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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 신문 - 민족을 품다 31글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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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9.14 18:12

아사히 신문    2010  10  28 

 




  '백년의 내일' – 닛뽄과 코리아 –  

 

바다를 건너는 문화  


민족을 품다 31글자에 


 

일본의 전통적 문학 장르인 단가. 그 31개의 글자 속에 자신의 마음을 담은 2명의 한국인 여성이 있다. 서울의 손호연 시인과 미에현 이가시의 이정자씨다. 인생 내력도 작품도 다른 2명의 시인이 단가가 아니면 전할 수 없었던 마음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역경을 살며 평화를 소원하다 

 







 시인 손호연  문학관의  이승신 시인

 

 

切実な願いが吾れに一つあり 争いのない国と国なれ 

 


절실한 소원이 나에게 하나 있지 다툼 없는 나
라와 나라가 되어라 

 


There is one dire yearning that I hold dear
One country and another without any conflict
  

 

 

2005년 6월 서울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고이즈미 준이치로 수상이 외신 기자회견에서 읊은 손호연 시인의  한 줄의 단가다  

 

일한관계가 정상화된 지 40년, 그 해는 “일한 우정의 해”라는 특별한 해였지만 양국간에는

암운이 드리워졌다.  3월 시마네현에서 “다케시마의 날”을 만드는 조례가 성립되자 한국은

이를 맹비난했고 야수쿠니 신사 참배 의사를 보이는 고이즈미 수상에게도 비판이 쏟아졌다.

그런 가운데 고이즈미 수상이 이 단가를 읊고 시인의 평화 정신을 언급한 것이다 

 


일한의 힘겨운 시대를 꿋꿋이 살아온 손호연 시
인의 마음이 담긴 단가에 실로 감동한 것일까.

손시인은 일본이 조선반도를 식민 지배했던 1923년에 동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와세다

대학 유학으로 법학을 공부했던 시기였고 낳자마자 곧 조선으로 돌아갔다 

 

1937년 일중전쟁이 시작되고 조선에서는 사람들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황민화 정책이 본격화 되었다. 학교에서는 철저한 일본어 교육이 행해지고 조선어를 사용하는 학생은 벌을 받기도 했다. 

 

서울의 진명여고를 졸업한 손시인은 동경제국여자대학에 유학을 했다. 거기서 단가를 접하게 되었고 단가의 시성이라는 사사키 노부쯔나의 지도를 받게 되고  졸업 후 조선으로 돌아와 무학여고 가정학 교사가 된 손시인은 1945년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을 맞게 된다.  식민지 시대를 시인은 어떠한 심정으로 살아 왔을까?  후에 당시를 회상하며 복잡한 심정을 한 줄의 단가로 이렇게 토로하기도 했다 

 

もう一つの祖国を胸に秘めながら日の丸の旗振りし日のあり  


조국을 가슴에 묻고 일장기를 흔들던 날이 있었
 

 

해방된 지 3년 후 한국이 건국되었고 독립운동가였던 이승만 대통령이 반일 정책을 추진하자 일본어 세대에 대한 주위의 시선은 험해졌다.  손시인의 장녀 이승신 시인은  “일제 시대에 태어나 일본어 공부를 강제로 받은 어머니는 한국말을 잘 하시지만 일제시대 한국에서 다닌 모든 학교에서 일어로 배웠기에 섬세한 표현들을 일어로 자연스레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방이 되고는 왜 적국의 언어로 시를 짓느냐는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암담하고 슬펐을까요” 라고 회고한다


그래도 손시인은 계속해서 단가를 지었다.  “

일본의 단가를 흉내내지 말고 조선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라.  어떠함에도 불고하고 도중에 그

만두어서는 안된다”  단가의 스승 시성 사사키 노브쯔나의 가르침이다 

 

일로 서울에 주재 중이던 1995년 손시인과 만났고 일본에 귀국하여 일부러 한국을 방문, 몇 해의 인터뷰로 시인의 반세기를 써 ’풍설의 가인’ 손호연 시인의 전기집을 출간한 키다데 아키라씨는 손시인이 “단가의 길은 가시밭길이었고 고독한 길이었다”고 말하며 일본의 강연에서 목소리가 막히던  것을 기억하고 있고  “일본이 강점했던 시대에 태어난 우리의 숙명입니다” 라고 몇 번이나 반복해 말했다고 한다 

 

손시인의 63년 시작 활동은 그의 만년이 되어서야  평가받기 시작했다. 1998년 천황의 궁중 가회시에 “배청자”의 자격으로 초대 되었고  2002년에는 일한 우호친선에 기여한 공로로 일

본 외무상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한국 정부에서도 2000년 문화훈장을 받았다.  

일본 아오모리엔 1997년 일본인들이 그의 시비를 세웠다 

 

해방 후 태어난 이승신 시인은 일본어를 모르는 한글 세대이다.  오랫동안 어머니의 단가에 관심이 없었고 읽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 후 일본어를 배워 어머니의 단가를 한국어와 영어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기획 출간하며 그 진실된 사랑과 평화의 마음을 세계에 전하고 있다  

 

隣りいて胸にも近き国なれと 無窮花を愛でて桜も愛でて 

 이웃해 있어 가슴에도 가까운 나라 되라고 무궁화를 사랑하고 벚꽃을 사랑하네 

 

한국을 상징하는 무궁화와 일본을 나타내는 벚꽃.
“양국간의 관계가 어려울수록 한국과 일본 양
국의 사랑을 받는 어머니의 마음인 한 줄의 단

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것입니다”

  

재일 2세  차별에 대한 분노

 

재일교포 2세인 이정자씨는 단가로 민족을 노래해 왔다. 조국을 빼앗기고 타향에서 살아야 했던 부모의 삶을 읊고 터무니 없는 차별을 고발한다. 단가에 담긴 메시지는 때로는 격하기도 하다  

 



下関より青森までをさすらいし飯場職人夫の父と知るのみ 

시모노세키에서 아오모리로 떠돌아 다닌 막노동자로서만 아버지를 알다 

 

아버지는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1910년 남쪽 지방인 진주에서 태어났다. 19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배 농사 짓는 데나 항만에서 일을 했다. 괴로웠던 경험을 묵묵히 말하지 않았고 전후에는 이불솜 타는 일을 했다. 어머니는 8살에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와 역시 힘든 생활을 하게 된다 

 



  朝鮮の母より文字を奪いたる「亡国」「貧困」それぞれの二字 

       조선의 어머니에게서 글을 빼앗아간 망국” “가난이란 두 글자



 

조선의 어머니에게서 글을 빼앗아간 “망국”  “가난”이란 두 글자.  이시인이 단가를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수업 시간에 '와카야마 보꾸수이' 등의 단가와 접하게 되었다.   

 

“단가라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로구나”   남이 하는대로 따라 하며 그렇게 노트에 적어 나갔다. 18살의 생일, 부모가 민족 의상인 치마 저고리를 지어 주었다


 

“이것으로 일본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저고리를 입은 나, 잘 어울리고”  상쾌한 마음으로 시골 길을 걸었다. 20살에 그 때의 마음을 ‘아사히 시단’에 투고하다 곤도 요시미씨의 눈에 띄어 입선을 했다

 

 はじめてのチョゴリ姿に未だ見ぬ祖国知りたき唄くちずさむ
처음 저고리 입은 나의 모습, 아직 못 본 조국을 알고 싶어 콧노래를 부르다 

 

투고는 가야마 마사코라는 일본 이름으로 했다. 하지만 “단가가 거짓으로 보이겠다”는 생각에 후에는 본명으로 투고하게 되었다.  “인간에겐 이름이 하나 밖에 없는 거야”

곤도씨의 격려로 첫 시집을 출간했을 때 재일 동포들은 “단가로 우리 민족을 노래하다니 있

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판 했다. “노예의 문학”이라고 혹평하는 문학가도 있었다

 

<偽善者>と告げくる手紙読む窓にあかねの彩のうつろいており
“위선자”라고 하는 편지를 읽네  창문에 새벽빛 스며드는데 

 

80년대 재일 교포들 사이에 외국인 등록증에 지문 날인을 거부하는 투쟁이 번졌다. 이시인도 이를 거부하다 형사가 반년을 매일 자신의 가게를 찾아 오기도 했었다. 짓궂게 괴롭히는 전화도 걸려 왔다

 

 友のゆび子のゆび吾がゆび罪もたぬゆびがなにゆえ虐げられぬ
 친구 손가락 아이 손가락 나의 손가락 죄 없는 손가락이 어이 학대 받는가 

 

날인 거부에 뜻밖에도 아버지가 화를 내었다. “일본에 사는 이상 그렇게 하면 안된다”   

전후 일본에 민족단체를 만든 아버지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사카 등과 달리 주변엔 재일 교포도 많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을 전할 수가 있을까?”  그런 마음을 단가에 담았다

작년의 정권 교체로 일본에 민주당 정권이 생겼지만 기대했던 영주 외국인의 지방 참정권 문제는 완전히 실종된 듯하다

 

百年を棲みつつ五世が生まれるに市民権なき民とし在れば
100년을 살며 5세가 태어나는데 시민권 없는 사람으로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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