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ssay 이승신의 詩로 쓰는 컬쳐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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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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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8.25 15:30

 

 


                                                                                                      2013    1    13

 

 

 

                            면면히 이으리

 

 그 날

 제물포 항구에서

 미국 이민선 갤릭호에 백 하나의 몸을 싣고

 망망대해 태평양만 바라보다

 마침내

 1903년 1월 13일

 그 황홀한 섬

 하와이 호놀루루에 닿기까지

 스무 사흘

 

 내리 교회 크리스챤의 주축이

 하와이 이민의 효시였고

 미국 이민의 시작이었다

 

 떠나올 제 그리던

 풍요로움과 신교육의 열망

 빛나는 하와이 햇살과 자연의 축복

 그 하와이안 드림이

 

 키를 훌쩍 넘는

 사탕수수의 밭에서

 부르튼 손가락과

 피멍 손톱되어

 서러움을 당하고

 어려움이 닥칠 제도

 

 믿음으로

 고향 산천 그리며

 한민족 특유의 근면함과 끈기로

 참고 견디며 기도를 했었지

 

 일제의 침략에 분노하고

 진주만 공격에 떨었어도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넘기며

 

 아 ~

 할머니의 할머니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흘리신 피땀과 눈물을 어이 잊으랴

 

 먼 이역만리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한 간절함

 후손들을 위한 희생

 

 선교와 언제나

 민족 운동의 핵심인 교회

 그 무릎의 기도

 밑거름 되어

 이제

 우리는 넘치는 축복을 누리나니

 

 조국이 외치는 글로벌화 세계화는

 이미 110년 전

 제물포항에서 시작된 것이다

 

 세상이 변하고

 산천이 변하고

 태평양 건너던

 스무 사흘의 배가

 10 시간 비행이 되었어도

 

 우리에게 흐르는

 대한민국의 피

 한민족의 DNA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에게 흐르는 믿음의 피는

 

 언제이든 어디서든

 면면히 이으리

 

 세상이 바뀌고

 세계가 좁아져

 그 바다 1시간에 넘는다 해도

 

 1903년

 그 날

 제물포 항구에서

 가슴에 품고 온

 소중한 믿음의 씨앗 하나

 그 귀한 사랑의 씨앗 하나

 

 면면히 이으리

 영원히 이어지리

 

 하나님 안에서

 

 

 

송영길 인천 시장과는 고대 국제 대학원을 같이 다닌 적이 있다

정치인에게 약간의 편견이 있는 나는 클래스에서 그와 말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졸업식 날 식을 하고 내려 오다 캠퍼스에 있는 조지훈 시비에 멈춰 서게 되었는데 그 비석에 새겨진 '승무' 긴 시를 그가 줄줄 외우는 것이었다 새삼 그를 쳐다 보았다

시를 좀 아는 정치인 송영길은 그 때 내가 시를 쓰는 지도 몰랐지만 그 후 내 시집이 나올 제마다 맘 좋은 미소를 지으며 감격해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인천 시장 선거에 나간다기에 보나마나 떨어지니 절대 나가지 마라고 점쟎게 조언까지 했다 

 

당선이 된 날 바로 전화를 준 것은 내 생각이 틀렸고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걸 은근히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는 지도 모른다

 

그러고도 여전히 나는 인천에 안가본 게 30 년이 되었는데 그저께 갑자기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인천에서 한 무리가 하와이 사탕수수밭으로 이주를 했는데 그것이 우리가 미국에 발을 디딘 첫 걸음이었고 올 해가 110주년의 해로 그 축시를 써 달라며 자매 결연인 호놀루루에서 그 시를 낭송하게 된다고 했다

 

하와이에 대한 아련한 마음이 있긴 한데 ~ 몇 달이나 있다 하느냐고 하니 낼 모레 1월 13일로 지금 당장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련한 마음이 있다 ~ 라는 말을 듣자 그는 믿고 전화를 끊었다

 

세상에 ~

긴 산문을 쓰다 시간 좀 줄여 본다고 단시로 쓰게 된 것이 그게 더 어려워 시간이 더 걸리는데

110년 장구한 두 나라의 역사를 한 줄로 쓸 수도 없고 시짓기가 강냉이 튀기는 것도 아닌데 이를 어쩌면 좋은가 

 

거기에 원래의 스케줄에다 일본 제일 오랜 전통의 고단샤 시잡지 '단가연구'에서 단가시 10 수를 청탁 받아 짓고 일어로 번역하여 보내야 하는 날도 같은 날이다

 

그러나 시간이 문제가 아니고 인천에 안가 본지 30 년, 와싱톤 뉴욕에서 방학 때 서울 집에 오려면 50 불을 더 내면 하와이에 stopover 가 되어 여러 번 하와이를 오고 갔지만 안 가본지 20 년이 되어 다른 일을 다 마치고 밤 1 시가 넘었는데도 그저 막막할 뿐이었다

 

아련한 추억이라는 것은 어려서 1904년 생인 할머니가 하와이의 신랑감과 사진 맞선을 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귀에 흘려 들은 적이 있다 이국적이고 하와이에 신부 신랑, 배를 타고~ 이런 말들이 뭔가 신비로운 이미지로 남아 있었는지 모른다

 

벌써 여러 시간이 지나 못한다고 잡아 떼면 110 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곤란할 것이고 이런 중대한 것을 이리 짧은 시간에 받은 것도 처음이어 어찌 해야 좋을 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사랑의 빚만 진 장복순 할머니 생각과 110년 전 나라에 흉년이 들어 무조건 배를 타고 어딘지도 모르는 이국을 향했던 크리스찬이 주축이 된 선조들 그리고 나의 미국의 삶 20 여년에 본 조국을 그리는 교민들의 그 심정을 한참 떠올리고 생각해 보며 태평양 바다를 건너 마침내 호놀루루 항구에 도착한 그들처럼 밤을 꼴깍 새워 새벽 4시 반이 되자 드디어 위와 같은 71 줄의 장시가 나오게 되었다

 

이건 나에게 기적이나 같은 일이다

시험을 이겼다고나 할까

 

여기에 어려서 각인된 하와이 사진 맞선의 이야기는 빠져 있다

할머니가 당시 그 먼 이역만리에 가시지 않았지만 하와이에 시집갔다면 어머니도 하와이 태생이요 나도 하와이 태생이었겠다 

 

틀림 없이 좋아하셨을 하와이를 한 번도 못 보고 가신, 첫 손주인 나를 지극 정성으로 길러 주신 할머니와의 추억은 그러나 내 가슴에 있다 

 

할머니가 하와이로 시집을 가셨더라면 ~ 하고 상상해 보던 그 어려서의 아련한 추억도 내 가슴 어딘가에 아직 고이 남아 있다

 

  

 

 


등짝을 내리치는 땡볕 속 당시의 사탕수수 거친 작업


하와이에서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낸 자금 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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