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ssay 이승신의 詩로 쓰는 컬쳐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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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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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2.08 11:20

 

 

    뉴욕 Plaza Hotel                                                                                                          2018  11 8                                                       

  

           이승신의 로 쓰는 컬쳐에세이            

산  책


'invisible보이지 않는 것이 visible보이는 것보다 중요하다' 고 성경에 쓰여져 있다.

성숙해가며 깨우치는 말이다.

 

내가 뉴욕에 처음 온 것은 1975년. 생각하면 용감했다. 아니 무모했다.   

임시 거처를 물어물어 정한 것이 International House로 Columbia 대학 근처였다. 영화에서나 본 잘라진 이미지의 파편을 들고 온 미국이었다. 미국 역사와 미국 문화공부도 제대로 없이 TOEFL을 보고 Visa와 입학서를 들고 왔다.   

 

두터운 이대졸업 앨범에 제대로 나오지도 않은 엄지 손톱만한 내 흑백사진에 동그라미를 여러개 치고 결혼 의사를 떠보려 서는 줄을^^ 피하여 다음 단계 공부를 하려던 마음이었지, 세계를 바꾸어 보겠다는 거창한 야망을 가지고 온 것 같지는 않다. 막연히 미국을 동경한 흐름이 나라에 있었고 부모님의 권유나 강요는 없었다.

 

묵는 동네를 돌아본다고 미국 오며 정성스레 싸온 옷을 잘 차려 입고 나오니, 길에는 새카만 흑인들이 어슬렁어슬렁 걷거나 길에 느슨히 기대앉아 나를 올려다 보았다.  겁이 덜컥 났다. 후에 보니 그것이 할렘Harlem이었다. 클린턴 대통령이 퇴임하고 거기에 사무실을 열어 동네가 훨씬 좋아졌다고 하나 그때는 피하는 지역이었다.   

 

가까이 보이는 웅장한 교회로 다가갔다. 미국 부의 상징인 록펠러가 지은 여러 교회 중 하나인 Riverside Church다. 꼭데기로 올라 낯선 땅 뉴욕의 수많은 건물을 바라다 보며 있을 곳도 아는 사람도 없다는 생각에 서러움이 몰려왔다. 아버지는 나를 덜렁 놓고 서울로 가신 후다.   

곧이어 워싱톤 죠지타운 Georgetown대의 공부와 삶이 시작되었고 2년 후엔 남동생이 뉴욕으로 왔다. 누나가 오니까 무조건 왔을 것이다. 5남매를 길러야 하는 그 시대의 부모님이 일일이 그런 권유를 할 틈은 없었다. 그는 오자마자 기차를 타고 누나를 찾아왔다. 미국 온 천지에 피붙이는 남매 뿐이어 우리는 손을 잡고 반가운 눈물을 흘렸다.

 

그 후 주말이면 뉴욕행 기차를 타고 가 동생 밥을 해 주었다. 국제 전화 값이 무서워 전화도 못걸던 때였다. 2차 대전시 수용소로 썼다는 Columbia대 John Jay 기숙사 방은 손바닥만 했다. 어머니같이 유머 감각이 있는 그는 투정대신 '책상에 앉아 이렇게 팔을 뻗치면 냉장고가 열려서 좋아' 라고 했다. 그 말에 더 안스러워졌다. 그렇게 매 주말 뉴욕행 기차를 탔고 좁은 방에서 함께 자기도 했다. 

 

어려운 공부만이 아니라 삶도 살아야 하는 우리는 서울서 등록금과 용돈이 와도 늘 주머니가 비었다. 그렇다고 서울에 SOS를 치지는 않았다. 벌지를 않았으니 늘 모자라고 궁했다.   

 

부모님 아래서 등 뜨뜻이 학교만 다니던 게 뭉클 그리워졌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었다. 명절이나 생일 크리스마스 이브 연말이면 케네디 대통령의 장례를 치른 거대한 St. Patrick 교회에도 갔지만, 우리는 맨하탄 시내의 호화 호텔인 The Plaza, The Pierre, The Carlyle, St. Regis 에를 내려가 화사하고 고급스런 로비를 즐기며 소파에 앉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한 해의 마지막 날이면 Time Square로 가 3, 2, 1 을 겹겹이 쌓인 미국인들과 외치며 새해를 맞았었다.

 

뉴욕의 겨울은 넘 찼다. 입술이 텃고 볼이 시렸다.   

한국에 가면 많이 잊지만, 여기만 오면 3, 40년 전의 삶이 영화 장면처럼 흐른다.

뉴욕 Plaza Hotel 앞에 서면, 그 앞에서 찍은 바바라 스트라이센드, 로버트 레드포드의 애틋한 영화 'The Way We Were '도 떠오르지만, 오래 전 우리의 삶과 사랑의 이야기도 떠오른다.   

 

40년 후의 뉴욕도 서울처럼 땅값이 엄청 올랐다고 한다. 어디를 보나 빌딩을 높게높게 짓고 있었다. 수 십년을 온 이 곳에 방 한칸이 없지만 그러나 뉴욕 명물로 여전히 우뚝 서 있는 Plaza Pierre Carlyle 에서 우아한 차 한잔은 이제 들 수 있다.   

 

춥고 어렵고 외로웠던 그 시절이 어제인 듯 떠오른다.    

그러나 생각하니 그때는 눈부신 젊음이 있었고 무엇보다 아버지 어머니가 살아 현존하셨다. 순수했고 가슴가득 희망이 있었다.   

 

자잘한 무엇을 사려도 타려도 눈에 보이는visible 돈이 필요했던 그때, 눈에 보이지 않는 invisible 그런 특혜가 나에게 있었다는 걸 알기나 했던가. 그러한 것은 고대로 언제고 있고, 그 위에 더한 성취가 노력하면 하나하나 쌓여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한 생의 어느 시점이든, 비록 그것이 가장 최악의 경우일지라도 축복은 거기에 함께 하는 것이라는 걸, 다만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 뿐이라는 걸 새삼 깨우치는 뉴욕의 산책이다.  

   

                                                 

       주말에 묵던 Columbia 대학 기숙사 건물

      Columbia 대학 메인 빌딩 - 2018 10

  Riverside Church -  New York  2018 10 

 The Plaza Hotel Lobby  -  New York  2018 10

The Pierre  -  New York  2018 10

   

 

  보안이 철저한 Trump Tower  - New York  2018 10

Central Park 의 Ice Skating  -  New York  2018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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