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ssay 이승신의 詩로 쓰는 컬쳐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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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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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9.18 22:13

 

 

 
                                                                                                                      2017  9   2

 

                 이승신의 로 쓰는 컬쳐에세이

 

                         그 날이 오는 걸 모르며 산다

 

 

"누구나 한 번은 가지만 우리는 그 날이 오는 줄을 모르며 산다."  갑자기 가신 하시모토 아키라橋本明 선생의 동경 추도식에서 사회자가 한 말이다. 한 날 한 시에 천여 명이 추모를 한다는 것은 그가 존경받을 삶을 살았다는 뜻일 게다. 생전의 교류와 넓은 인맥을 나타내듯 일본의 각계각층이 모였다.

 

처음 그를 만난 것은 4년 전 동경에서의 나의 출판기념회에서이다. 여러분의 권유로 서울에서 출판기념회를 하자 다시 동경에서도 해야한다는 권유를 받았다. 내가 사는 곳이 아니니 많은 사람을 불러 모을 자신이 없고 비용도 많이 들어 반대를 했으나 결국은 하게 되었다. 그 전날 밤 광화문의 최서면 선생을 찾아가 큰 홀을 채워야 하니 오실만한 분이 있으면~ 하니 들고 간 책을 보지도 않았으면서 바로 동경의 몇 분에게 전화를 건다.

 

그렇게 다음 날 동경 외신기자 클럽에 하시모토 아키라 선생이 왔고 행사 후 긴 줄에 서서 그의 차례가 오자 감격했다는 말과 함께 악수를 했으나 나는 그가 누구인지를 몰랐다. 

그 후 최서면 선생 말씀이 전화받은 몇 일본 사람들이 '나와 시詩가 뭔 관계가 있는가' 툴툴대며 갔는데 안갔으면 큰일날 번 했다고 했다. 그리고는 하시모토 선생이 세 번을 서울에 왔다.

 

그는 교도共同 통신의 저명한 저널리스트로 많은 책을 저술한 작가이나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장래에 일본 천황이 될 아키히토明人 황태자와 학습원學習院의 같은 반 동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도 아버지가 검찰 총장이요 사촌형이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총리였으며 친동생이 시코쿠의 도지사인 가문이나, 왕족과 귀족가를 받은 학습원이라고 해도 나라의 천황이 될 황태자를 맞는다는 것은 수십년에 한 번 있을 일이다. 황태자가 있는 반이 36명으로 그 클라스메이트 뽑는 것도 신경을 많이 썼을 터인데 거기에 하시모토 아키라橋本明가 들었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천황의 학교 친구를 동기생이라 하지 않고 '고가쿠유 御學友'라는 특별 존칭으로 불리운다. 학습원 고등 시절 그는 황태자와 긴자 거리를 다닐 만큼 '절친'이었다. 장례식에 대처 등 유럽 국가 원수들과 함께 한 사진들 액자 앞에 생전의 저서를 늘어 놓았는데 "미치코 황후의 연문戀文" "알려지지 않은 천황 아키히토明人" 등 일본 천황에 대한 책만도 4권이 보인다.

 

그를 안 것은 짧은 기간이었으나 서울에서 세번, 동경에서 네번, 교토에서 내가 공부할 적에 온 적이 있고 아키타 시에서도 있었다. 아키타는 음악을 좋아하고 매해 바티칸에서 합창을 해온 그가 일본 작곡가에게 나의 시를 주며 작곡을 의뢰해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함께 한 음악회를 했는데 거기에 그가 왔고 나와 함께 무대에서 스피치를 했다. 동경에서도 같은 음악회를 두 번 했는데 공부로 못간 나를 대신해 한국의 시가 지어지고 작곡이 된 경위를 2천 석 음악 홀에서 연설하기도 했다.

 

정 많고 아주 인간적인 그는 자신이 대표로 있는, 한국을 공부하는 동경의 '일한담화실日韓談話室'에 서울에서 강연하러 오는 91세 최서면 선생이 갑자기 가시게 되면 자기에게 제일 먼저 알려달라고 나에게 깊은 걱정을 한 분이 먼저 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를 본 것은 5월 27일 최근으로 한일관계의 최고 권위자인 최서면 선생의 이야기인 '한국연구의 귀재 최서면' 그의 동경 출판기념회에서다. 꼭 참석해 달라는 전화가 서울로 왔고, 가니 "진짜 왔네요' 하며 반겼다. 최서면 선생을 여러 해 만나며 쓴 책에 만족한 듯 무대에서 많은 이야기를 했었다.

 

그렇게 건강해 보인 분이 다음 날 병원에 검진하러 가서 두달 입원후 가셨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유감인 것은 그가 1974년 육영수 여사 피살로 서울에 인터뷰차 처음 온 이후 한국을 좋아하는 친한파가 되었고 한국과 한일관계에 대한 많은 글을 썼는데 한일관계의 과거를 뒤로 하고 미래로 나아가려면 천황의 한국 방문이 제일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 실현을 위해 힘을 써왔기 때문이다. 

 

일본의 장례식은 극히 조용했고 경건했다. 특히 놀라운 것은 서울에서 부인에게 전화를 하니 갑자기 갔음에도 슬픔의 기색이 전혀 없이 평시보다 밝고 명랑한 음성이었다. 아버지의 갑작스레 가심으로 일년이나 입원하시고 장례도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슬퍼하신 어머니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려지는데 슬픈 기가 안보이다니 이해가 가질 않았다. 최서면 선생께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 우리는 안 울면 이상하게 보는데, 돈을 주어 곡도 하는 판에~ 하니 '그게 일본인의 교양이지' 라고 했다.

 

가시고 열흘이나 후 저녁에 추도식인 오쯔야를 했고 다음날 아침에 장례식을 했다. 우리는 장례식 전의 사흘을 어느 때고 가서 절을 하지만 이들은 시각을 정해 한꺼번에 모여 추도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홀 밖으로도 수백명이 줄을 섰고 한사람씩 나아가 절을 했다. 게이코 부인은 추도식에는 검은 양복을 장례식에는 검은 기모노를 입었다. 김과 차와 연어 반찬이 든 선물을 받았고 2층 큰 식당에 나온 식사는 일본답게 스시였다.

 

추도식과 장례식을 참석하면서 화안히 웃고 있는 영정사진과 관속의 모습을 보며 한반도와 동북아에 위기가 몰려 온 지금, 양국의 돈독한 관계를 위해 큰 별 하나 잃음이 애석하다.

 

죽음이 슬픈 것은 이 지상에서 다시는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눈으로 보면서도 우리는 그 날이 실제 오는 걸 모르며 살아가지만 모쪼록 그가 43년 품어 온 한국사랑과 더 나은 한일관계를 위해 헌신해 온 그 열정이 부디 식지 않고 한일 양국에 잘 이어져 가기를 소망해 본다.

 

                                            다음 차례는 누구일까 아무도 모르면서 장례 줄에 서 있네

 

                                                                                                   손 호 연

 

줄이고 줄여도 길어진 위의 글을 시인 손호연은 일찍이 이 한 줄로 축약했다.

 

 

 

 


내빈실 안의 경건한 추모식 오쯔야  - 동경  2017 8  24

 

 학습원 고교시절 소풍, 좌측이 천황, 우에서 두번째 하시모토 아키라

 

생전의 많은 저서 중 천황에 대한 책이 4권, 우편의 최근작 최서면선생 이야기

 
내빈실 밖으로 줄을 선 수 많은 조문객 

 

하시모토 아키라상 (우편) 출간기념회에서 강연하는 최서면 선생 -동경 2017  5 27

 
수많은 이름 중 최서면선생 이름이 크게 보인다

 

남은 가족, 왼편의 아들 마나부, 부인 하시모토 게이코, 우편의 딸  

 

아키타市의 문화회관 음악회, 우편에 웃고있는 하시모토 아키라 - 2016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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