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ssay 이승신의 詩로 쓰는 컬쳐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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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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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3.29 22:46

 

 

 

                                                                                                                                                       2015   3  29

 

 

                                                      나는 왜 교토로 가는가 

 

 

이 글을 써서 떠나는 새벽 전해드리려던게 일에 밀려 교토에 와서야 나머지를 씁니다

 

제가 20여 년 미국의 삶을 뒤로 하고 서울에 온지도 20년이 넘었습니다 

한국 방송의 Barbara Walters가 되어달라는 정부의 끈질긴 권유로 사양하다 오게 되었고 제가 기획한 시사 보도 프로들이 KBS를 비롯해 많이 방영이 되었습니다.  상상못한 좋은 일과 태산 같은 어려운 일이 많았지만 정작 기억에 남는 건 일상의 아주 작은 것들입니다

 

처음 와서 저쪽 앞에서 누가 저를 향해 걸어오면 미국에서 하듯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후에 보니 그들은 표정없이 가다가, 내가 아는 여잔가?  싶은지 뒤돌아 보았습니다

세상을 좀 밝게 해보겠다고 끈질기게 미소지었으나 10여 년 지나니 아는 이 외에는 무뚝뚝한 그 환경에 저도 풀이 꺾이어 미소가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보는 이마다 lady인 저의 나이부터 물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을 그게 화제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그게 왜 화제가 될까요.  한 줄의 시보다 짧은 이 삶에 마음을 맞추면 나눌 대화가 참 많아질 텐데요

 

그런 예를 일일이 들자면 한이 없습니다

제가 더 나은 길로 인도해야 하는 건데 저도 모르게 물들어 가고 있는 건 아닌지 모릅니다

일과 일상을 살아갈수록 몸과 마음이 짓눌려 졌습니다. 자주 시골과 가까운 이웃 나라를 갔습니다

그렇게 20 여년이 지나자 처음 와서 저처럼 미국에서 온 분들이 살던 곳으로 되돌아간 것과 제게도 편안한 나라로 어서 돌아가라고들 한 생각이 났고, 닳아가는 감성을 충전하고 상처난 감정을 풀려면 저도 이제 좀 나가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남들은 이제쯤 고향으로 돌아오는 때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한국에 제가 창조해낸 일들이 늘어나 그 일도 좀 보기위해 살던 와싱톤에 15시간을 가고 오려면 그것도 다시 일이 되겠습니다

 

지난 10여 년 자주 간 일본을 생각했습니다

스피치와 시낭송회, 강연 등으로 갔지만 긴 기간을 간 적은 없고 더구나 미국통인 제가 미디아에 나간 저의 한일韓日에 관한 글 등으로 일본통으로 잘못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이 김에 일본과 일본 사회를 깊숙이 들여다보는 건 어떨까, 비슷하게 생기고 겹치는 조상을 가졌음에도 왜 그리 계속 삐걱대는 걸까.  일본어로 스피치를 할 때도, 두 권의 제 일본 시집을 낼 때도, '이승신의 컬쳐 에세이'를 일본팬들에게 보낼 때에도 번역을 다른 분들에게 부탁하여 제가 감수해 왔는데 일본에서 하루도 공부 안한게 늘 맘에 걸렸습니다

 

더구나 문학이라는 예술의 핵심으로 어려운 한일관계를 승화시켜 보려고 일생 노력해 온 어머니나 저에겐 최악이 된지 오래인 이웃과의 관계가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본의 보물인 만엽집(1400여 년 전의 최고 단가들을 집대성해 놓은 책들)의 고향이요, 천년의 수도인 교토에 가면 천왕의 성인 고쇼御所 바로 옆의 최고 사립명문인 동지사 대학에 들려 150년 역사의 캠퍼스를 산책하곤 합니다.  그 크리스챤 대학에 처음 지은 건물인 아름다운 붉은 벽돌의 채플을 지난 봄 바라보고 섰는데 모르는 일본 교수가 그 앞 매화꽃을 가리키며 아름답지요? 하기에 이런데서 공부하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했더니 저를 끌고 가 신청서류 한아름을 안기었습니다

 

그렇게 1년 후 합격 통지가 왔고, 되는 것도 안되는 것도 없다는 서울을 다 놓고 몸만 빠져나와, 어제 오늘 시험을 치고는 그 채플 바로 곁에 있는 우리의 국민 시인, 윤동주와 정지용의 시비 앞에 지금 이렇게 서 있습니다.  70년 전 일제강점기에 이 대학을 다닌 두 위대한 시인의 혼을 잇는다는 의미는 대단한 기쁨이지만 제대로 따라갈 수 있을지 긴장이 되기도 합니다

 

시비 곁엔 우리의 무궁화가 심겨져 있고 제 머리 한참 위로는 마침 벚꽃 꽃망울 수 억만개가 거대한 우주의 우산인듯 둥그렇게 펼쳐지며 저를 향하여 꽃 폭죽처럼 터지고 있었습니다

 

겁없이 와 겁이 좀 나지만 유관순의 후배답게 의연히 해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감동없는 정상들 보고만 자꾸 바뀌라고 비판할 것이 아니라 실제 이렇게 와 몸으로 부딪치면 이웃과의 관계에 무슨 실마리가 풀릴지도 모를 일이고  또 늦으막이 공부하는 것만큼 충전과 자신의 깊은 내면을 마주하게 되는 것도 삶엔 아주 드문 일일테니까요  

 

사나흘 머무는 것과 장기로 있는 것은 역시 다르군요


 

많은 격려와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집 앞을 흐르는 가모가와鴨川 강

                    그 위로 비치는 하아얀 반달

 

                    거기에 떠오르는 두고 온 너

 

                           긴 겨울 기다려온

                        꽃은 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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