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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 신문 - 한일간의 가교인 어머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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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8.29 22:02
産経新聞  2008  8  30
 
한일간의 가교인 어머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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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해 있어 마음에도 가까운 나라가 되라고
무궁화를 사랑하고 벚꽃도 사랑하네



호연 단가연구소 대표인 이승신 시인은 827일 일한 문화교류기금상을 수상하고 한국에서 단가를 지어온 어머니 손호연 시인의 추억을 회고했다
 
어머니는 일본에 유학을 가서 단가短歌를 배웠다. 귀국 후에도 한일 우호를 기원하는 단가를 많이 지었고 남의 나라 말로 쓰는 것을 비난받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일생을 계속해 단가를 지으셨다

이승신 시인은 어머니의 사랑과 평화의 그 유지遺志를 이어 작품을 한국어와 영어로 번역해 출판하고 그 정신을 세계에 알리는 등 다양한 형태의 발표로 일한 문화교류에 기여해 오고 있다

다케시마 (한국명:독도) 문제에 대해 이승신 시인은 큰 시야를 가지고  보면 한일 양국은 사이가 좋았던 시기가  훨씬 더 깁니다. 꼭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믿고 그것을 위해 저도 한층 더 노력해 가겠습니다

그는 수상 인사말을 이런 단가로 매듭지었다
 
 
절실한 소원이 나에게 하나 있지 다툼 없는 나라와 나라가 되어라"
 
 
 
【集  일한 문화교류기금상 수상식2008 827 서울 롯데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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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소감에서 어머니의 단가를 낭송하는 이승신 시인
 

일한관계 우호촉진에 공헌한 한국인에게 수여하는 [일한 문화교류기금상] 수상식이 개최되어 한국인 가인 손호연의 장녀인 이승신시인이 수상했다. 이승신 시인은 어머니인 손호연 시인이 일본어로 지은 단가를 한국어 영어로 번역, 한국에서 출판하고 다양한 예술로 발표하는 등 단가를 통한 일본 문화 이해에 진력한 점이 평가를 받았다.
 
가인 손호연은 1923년, 아버지가 와세다 법대 유학 중에 동경에서 태어나자마자 귀국하여 일본 통치하의 서울에서 소녀 시절을 보냈다. 여학교 시절은 조선어가 폐지되어 쓸 수가 없었고 일본어가 국어로 상용되었다
 
내선일체内鮮一体 정신하에“일본인과의 우정을 키우자"고 손호연은 동경 제국여자대학으로 유학했다. 하지만 조선 출신인 것이 알려지자 급우級友들은 그와 거리를 두었다
 
실의에 빠진 그 때 만난 것이 단가였다. 스승인 단가 대가인 사사키 노부쯔나 佐佐木信綱로부터“조선에는 아직 단가를 짓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조선 여류 가인으로 열심히 노력하고 절대 도중에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격려를 받았다.
 
그 후 귀국하여 [한국의 유일한 단가 가인]으로 불리고 63 년동안 지은 단가는 2000 여수가 넘는다. 그 공적이 인정되어 평성 10년, 1998년에는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궁중 우타카이하지메 宮中歌会始의 배청자 陪聴者:천황이 지어 직접 낭송하는 것을 대가 입장에서 들어줌)로 초대를 받았다
 
일본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한국에서의 사정은  달랐다.“왜 일본어로 단가를 짓느냐"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말에 상처를 입으며 고뇌하면서도 그는 단가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지어왔다.





 
그 단가에 담긴 사랑  평화 일한 친선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 어머니의 그런 마음을 전하려고 이승신시인은 단가를 한국어와 영어로 번역 출간하고 여러 다양한 형태로 발표해 왔다
 
수상의 자리에 선 이승신 시인은 인사말 끝에 어머니의 단가를 낭송했다. 이 단가는 평성 17년 2005년 서울에서의 일한 정상회담 때 고이즈미 일본 수상이 연설에 인용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절실한 소원이 나에게 하나 있지 다툼 없는 나라와 나라가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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