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적 軌跡 - 相模女子大学同窓会 翠葉会 강연
무궁화에 담은 마음
손 호연 시인
쇼와18 - 1943년 가사과 졸업
평성15 - 2003년 11월 22일 서거
흔히 예술에는 국경이 없다고들 하지만 내가 선택한 단가의 길은 국경 아닌 국경이 가로막고 있어서 어두운 마음으로 오랜 세월을 보내왔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모국은 일본에서 독립하긴 했지만, 예속된 나날의 마음의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았다. 국민 대부분은 “일본 전통시”라는 전통에 대한 거부감으로 단가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우리 민족이 그렇게 인식하는 단가에 왜 나만이 겁 없이 빠져 들어갔을까 생각해 보지만 처음 발을 디딘 길은 세월과 함께 더더욱 빠져나가기 어려운 일이 되었다
“단가를 이제 그만 둬야 하나, 계속해야 하나” 여러 해 하루종일 그 갈등 속에서 살아왔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다 그 고민을 완전히 떨쳐 버린 것은 일본 아오모리현 롯카쇼무라에 나의 시비가 세워진 후의 일이고 그것도 불과 5년여 밖에 되지 않는다. 시비 건립을 계기로 “궁중 신년 우다까이하지메 宮中新年歌會始”를 비롯하여 헌정회관 모교인 사가미 여자대학 이나기시공민관 (도쿄) 다카오카 축제 (도야마현) 등에서 잇따라 나의 강연회가 열렸다일본 내에서 이국인異國人이 쓴 가집에 대한 반응이 높아졌고 한국 언론들도 이전과 달리 나에 관한 정보가 일본에서 들어와 점차 눈에 띄게 신문 등에 기사화 되기 시작을 했다
하지만 한국민 모두가 단가의 진가를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먼 앞 날의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 나라 사람들도 단가의 뿌리가 우리의 향가 鄕歌 인 것을 깨닫고 조상들에게서 이어져온 보물을 내버려 둔 어리석음을 후회할 날이 반드시 찾아 올 것이다. 나는 단가를 쓰기 시작한 이상은 비판적인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인내심을 갖고 많은 동족이 이해해 줄 때까지 기다려 나갈 것이다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 에피소드 두 가지를 털어놓을까 한다
6.25 후 국내가 안정을 되찾기 시작할 무렵, 나는 제 2가집 ”무궁화”를 출판했다. 일본어로 지은 시집이라고 해도 한국의 국화를 책 제목으로 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갓 출판된 시집을 일본에 신문사 지사장으로 주재한 적이 있는 원로 시인에게 증정했다
그 시인은 책을 잠깐 넘겨 보다가 일본어로 시집을 낼만한 문재와 열의가 있다면 우리 나라 고유의 시조에 대해 관심을 가지라며 명함 뒤에 소개문과 시조 선생의 이름과 연락처를 써 내게 주었다. 한국인으로서의 바른 길을 제시해 준 그 고마움이 뼈에 사무쳤다
하지만 일제 시대에 제대로 배우지 못한 한글에 대한 지식이 모자라 시조 입문은 도저히 자신이 없었고 의욕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출판에 얽힌 에피소드. 일본어로 된 시집 출판회 축사에 누가 제일 어울릴까 곰곰 생각한 끝에 일한사전 편집자인 김선생에게 부탁을 했는데 기대는 역시 빗나갔다. 등단하자마자 엄한 어조로 “독립한 지 몇 해가 되었습니까 ”라고 말했다. 갑자기 회장은 싸늘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 출판 기념 후 몇 달이 지나 한 통의 편지가 왔다. 그에게서 온 것이다. “지난 번에는 대단히 결례를 했습니다. 국회의사당 도서관에서 ‘참회를 하다’ 라는 글을 찾아 보십시오”라는 내용이었다. 기억이 흐려져서 제목도 글의 내용도 확실하지가 않지만 “독립한 지 10 여년이나 되는데 아직까지 일본어로 단가를 쓰는 걸 괘씸하게 생각했지만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니 한일간에 스포츠 경기가 있다면 손시인은 조국의 선수들을 위해 박수칠 것임에 틀림이 없다” 라는 내용이었다
단가를 쓰고 뜻을 세워 온 지 반세기 그 동안 격려와 위로의 말 대신 마음 상한 에피소드를 들라면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단가를 좋아하기에 마음에 받은 상처는 곧 사라지고 책이나 새로 지은 단가를 이해해 줄만한 사람들에게 보내게 된다. 일본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국내에서 보낸 것에는 답신이 없는 것이 다반사다
내가 책을 보낸 사람들은 상당한 일본어 실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읽지도 않고 단가는 모르겠다, 어렵다고들 했다. 그리고 이구동성으로 골아픈 단가는 이제 그만하고 건강을 챙기라고 나를 염려해 준다. 나의 건강을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분도 고맙지만,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이 책을 보고 “밤 새워 다 읽었다” 거나 “몇 페이지의 이 단가가 참 좋았다”고 고양된 목소리로 말해 줄 때 “ 좋은 단가를 또 들려 주세요” 라고 부탁을 할 때 내 마음의 근심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게 된다
사람들에게는 각종의 여러 모임이 있게 마련이다 가끔이라도 그런 모임에서 감동을 주는 시를 같이 음미한다면 더 좋은 마음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시에 관한 화제가 전혀 없는 모임은 왜 이리 무의미한가 생각하면서 귀로에 오를 때도 있다. 단가의 무엇이 그리 좋은가 진지하게 단가에 관심있어 하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만나 보고 싶다. 왜 마음에 상처를 받으면서까지 나는 단가를 계속 쓰려고 하는가 왜 나는 주위에 단가 하는 친구 하나 없이 마치 유형을 받고 고도에 있는 것만 같은 고독감에 둘러싸여 여기에 있는 것일까 하지만 어떠함에도 나와 단가와의 운명적인 만남은 쉽게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이 나에게 준 재능이기에 이 노래 씨앗을 소중히 길러 나가야 하겠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다. 끊임없는 고난 속에 황량히 이어져 온 우리 민족에게 등불이 되는 단가를 꾸준히 지어야 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역사의 물결 속에서 나라를 잃고 모국어를 잃고,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로이 할 수도 쓸 수도 없이 마음만 애태워온 세월 “일본어 상용”이라는 환경 속에 강제로 배워야 했던 일본어. 억지로 학습을 중단 당한 모국어보다는 훨씬 나은 그 언어로 단가를 지어 온 지 어언 60년
그 세월 돌이켜 보면 모국을 잃고 모국어를 잃고 일본어를 빌려 내 가슴의 감동을 서슴없이 표현해 왔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일본어도 단가도 내게는 영원한 외국어일 뿐이다
그래서 내가 쓴 단가 중에 뛰어난 우수작을 찾는 것은 아마 어려운 일일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