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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 신문 - 한일간 사랑과 평화를 기원하며, 나카니시 스스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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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9.11 17:52

 

 

한일간의 사랑과 평화를 기원하며 

 

손호연 시인이 남긴 혼신의 단가 

 - 또 하나의 조국을 가슴에 품고 -  


 

                                         나카니시 스스무 교토 예술대학총장

 

2005년 6월,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수상이 한국에서 정상회담을 마친 후, 외신 기자회견에서 하나의 단가를 인용하고 그 정신을 이야기했다

 

   절실한 소원이 나에게 하나 있지  다툼 없는 나라와 나라가 되어라
 

한일 양국간에 다툼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는 절실한 소원을 나는 가슴에 품고 있다고 노래하는 단가다. 작가는 한국의 손호연 시인. 2년 전 세상을 떠난 한국 유일의 단가시인이었다.

 

     격동의 세월 살아온 심정을 간절히 일본어 표현을 통해 마음을 드러낸 작품
 

고이즈미 수상이 시인 손호연의 시를 소개한 것은 한일 우호상 참으로 잘한 훌륭한 일이고 우호가 소원이었던 손호연 시인이 기뻐했을 일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손호연 시인을  20년 이상 잘 알아왔기 때문이다.

 

지금 손호연 시인이 남긴 6권의 가집 작품들을 돌아보면 그의 노래 주제는 사랑과 평화라고 생각이 된다. 첫 번째인 사랑에 대해 무엇보다 절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부군의 죽음을 애통해 한 이 노래다.

 

 그대여  나의 사랑의 깊이를 떠보시려  잠시 두 눈을 감으셨나요
  

 남겨진 사람은 갑작스런 그 죽음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장난으로 눈을 감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 생각할 수도 있다. 이 노래도 그런 마음을 바탕으로 하여“내가 죽으면 아내는 과연 슬퍼할 것인가”하며 남편이 자신을 시험해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악몽 속에 일말의 희망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별의 슬픔 절창

 

이 노래를 비롯하여 손호연 시인은 가까운 사람들의 사랑을 자주 노래로 지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일제 시대, 조국 해방으로부터 한국 전쟁, 아버지의 납북, 독재 군정의 중압으로 이어지는 어두운 시대, 인간의 이별의 슬픔 등을 온 몸으로 맞아 왔기 때문이다.
 

그런 경험들로 나라의 평화에 대한 소원이 그의 제 2의 주제로 떠오른다. 소녀 시절 일본어 단가로 마음 표현하는 법을 몸에 익힌 그는 이제 다른 형식을 선택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한국인이어서 시조, 일본인이어서 단가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자체가 2개의 국가로 갈라 놓인 손호연 시인의 원점이고 그 때문에 양국의 평화와 우호를 절실히 기원하는 것이 그의 생애의 바램이 되었다. 

 

もう一つの祖国を胸に秘めながら 日の丸の旗振りし日のあり

조국을 가슴에 품고 일장기를 흔들던 날이 있었네 

 

일제시대에 지었던 노래다. 오래 전부터 손호연 시인에게 2개의 나라는 하나의 나라로 존재해야 했다. 그럼에도 다툼은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고이즈미 수상이 언급한 노래와 같은 시인의 소원은 앞으로도  계속될 수 밖에는 없다


                                 그 사다리를 이어받자

 

손호연 시인은 이제 여기에 없다.

그래서 앞으로의 한일간 평화를 위한 기원은 우리가 이어가야 할 의무다.

다행히 일본 정부에서는 중요한 문화사업 중 하나로 손호연 시인의 업적을 기리어 단가와 시조로 한일 양국 간에 평화의 사다리를 이으려는 행사를 가까운 시일 내에 가질 예정이다.
 

일본어로 된 손호연 시인의 전기“풍설의 가인"도 출판되었고 최근에는 가인의 생애를 다룬 TV 다큐멘터리“일본 열도에 핀 무궁화’도 시인의 장녀 이승신의 기획으로 제작되었다.


이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손호연 시인의 사랑과 평화를 위한 기원을 더욱 더 절실하게 가져 주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 

  

                             생애를 더듬는 비디오 완성


다큐멘터리 비디오“다툼 없는 나라와 나라가 되어라 - 가인 손호연의 생애”일본어판의 판매가 시작되어 일한친선협회 중앙회 (사이토 쥬로 회장)의 주최로 동경도내에서 열린 영상시사회에는 은사와 친구를 비롯하여 손호연 여사와 인연있는 사람들이 한일 양국에서 모였다.

 

2003년에 돌아가신 손호연 여사는 일제식민지시대에 17세로 일본으로 유학했다. 1941년, 동경 제국여자전문학교의 사감 선생님으로부터 와카 지도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2명의 스승과의 만남이 그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사사키 노부쯔나 선생님으로부터는“일본인을 따라 하지 말고 조선 고유의 미를 노래하라"고 가르침을 받았고 나카니시 스스무 선생님으로부터는“만엽집 萬葉集은 백제가 뿌리요 그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라는 격려를 받았다

 

1943년,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도 노래를 지었지만 한국인이 왜 일본어로 시를 짓느냐는 비난을 홀로 수십년간 참아내야 했다. 그 후 일본 황실의 [신년 우타카이 하지메]에 초청받기도 하고 아오모리현 롯카쇼무라에 그의 시비가 건립되기도 했다.

 

장녀이자 손호연기념사업회 이사장인 이승신시인은“어머님이 원했던 것은 평화와 사랑, 노래를 보면 말의 힘, 어머니의 심정을 느낄 수 있다. 특히 한일간의 사다리 역할 하기를 바라고 있었다"고 했다.

 

고인은 고이즈미 수상이 올해도 반복한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다툼"이 끊이지 않는 한일관계의 현상을 시인은 어떠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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