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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 한일간 사랑과 평화를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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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9.11 13:53

한국일보  2005  1  18

  
   

 

 손호연 시인  2002

 

한일간의 사랑과 평화를 기원하며

 

'기미가요'는 천왕의 치세를 찬미하는 일본 국가다. 작은 돌이 이끼 무성한 큰 바위가 될 때까지 임금의 치세가 이어지기를 기원하는 짧은 노래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으로 시작하는 우리 애국가와는 생성과 소멸의 미학이 정반대지만 영원을 희구하는 점에서는 같다

 

'기미가요'는 백제 출신 학자 기노쓰라유키가 편찬한 '고금와까和歌집'에 실려 있는 단가시다. 905년 간행된 이 책에는 백제 박사 왕인이 지은 일본 최초의 단가 '매화송'도 수록되어 있다. 백제인이 일본 왕족과 귀족의 주축을 이뤘던 점, 그들이 단가를 즐겨 노래했던 점 등으로 미루어 단가와 '기미가요'의 창조자는 백제인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일 관계에 얼룩진 문학적 생애

   

단가는 31자에 느낌과 생각을 담는 정형시다. 17자로 이루어진 하이쿠(俳句)와 함께 일본인들이 아껴온 문학 장르다. 일본인이 소중히 여기는 '만요슈(萬葉集)'에는 백제 도래인의 자취가 엿보이는 단가가 많이 있으나 정작 우리는 단가의 원형인 단가(和歌) 형식을 역사의 어느 구비에서 잃어버렸다

 

유일한 한국인 단가 시인 손호연 시인도 2년 전 타계했다. 단가에 집중했던 그의 문학적 생애는 많은 사연과 한일 문화사의 깊은 굴곡으로 얼룩져 있다. 혼란스러운가 하면 안타깝고 기구하다. 진명여고를 나온 그는 동경제국 여자대학에 유학하는 동안 단가 문학의 최고 권위자인 사사끼 노브쯔나에게 사사했다. 어리고 여린 감수성 위에 내려진 문학적 세례가 그를 평생 일본어에 의지해 단가를 노래하게 만든 것이다

 

우리 민족이 일본 전통시라고 믿고 있는 단가를 계속 지을 것인가 그만둘 것인가 하는 갈등이 거의 매일 반복되는 가운데 60여 년이 흘렀다. 그는 2,000여 편의 단가를 남겼고 일본의 최대 유명출판사 고단샤에서 6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그 중 다섯 권이 '무궁화' 라는 제목이다. '제1무궁화' '제2무궁화' ·일본어 단가로 쓰여졌지만 역사와 시대를 배경으로한 일상의 정서를 읊을 뿐 친일 문학은 아니다. 그의 딸 이승신 시인이 우리 글로 옮긴 단가들을 본다

 

겨레가 말없이 순종하는  오욕의 날을 눈여겨보던 나라 꽃 무궁화  

 

연이어 망명객은 돌아오는데 오지 않는 한 사람 아버지, 그리워라 

 

6·25 동란으로  혼자된 어머니 지금 내 나이보다 훨씬 젊었네

 

시집을 내고 원로 문인의 꾸중을 들었다. "나라가 독립되고 세월이 흘렀소. 우리에게 자랑할 만한 한글과 시조가 있지 않소, 생각을 바꾸시오" 큰 상처를 받았으나 당연해 보이는 충고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첫 사랑처럼 각인된 단가에의 감수성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그 시를 지었다. 문학적 재능이 축복이자 굴레가 되었다. 그는 언젠가는 단가의 근원이 우리 것임을 인정받고 우리가 다시 단가를 갈고 닦을 날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역사에서 한일 간의 단절과 뒤틀림은 그의 문학적 삶마저 왜곡시켜 놓았으나 만년에 이르러 한일 문화 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2000년 대한민국 문화 훈장을 받았다. 2년 후 일본 정부에서도 표창을 받았다 일본 아오모리에는 단가의 대가인 그를 위한 시비가 세워져 있다

 

올 해는 을사 국치 100주년 광복 60주년이 되는 해다. 또 한일 국교 정상화 40주년을 기념하는 '한일 우정의 해' 다. '무슨 해'라고 별 신통력이 있을까마는 일본에서는 지금 양국민의 해묵은 정서적 거부감을 치유해 줄 뜨거운 전류가 이상 기류처럼 흐르고 있다  '겨울연가'가 불러일으킨 한류와 '욘사마 현상'이다

 

양국 해묵은 거부감 치유되길

 

손 시인의 외로운 작업도 뒤늦게 평가를 받고 있다. 한류 뿐 아니라 동북아에서 중류·일류도 공평하고 평화롭게 흐를 날이 가까와 오는가. 시조와 다른 매력을 지닌 단가의 탄생지가 한반도임을 밝히는 일이 학자들의 숙제로 남아 있다

 

절실한 소원이 나에게 하나 있지 다툼 없는 나라와 나라가 되어라

 

 

박래부 수석 논설위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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