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ssay 이승신의 詩로 쓰는 컬쳐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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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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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09 08:45
1887년 세워진 데이코쿠帝國호텔 로비와 벽화
이승신의 詩로 쓰는 컬쳐에세이
만  남

거의 4 년 만의 동경입니다.
코로나 기간보다 조금 더 길었습니다.

어려서 아버지와 함께 한 기억들로 동경은 늘 같은 호텔입니다.  하네다 공항서 달려와 그 문을 들어서면 아버지의 음성이 들리는 듯 하여 눈물이 고입니다. 내가 고아로구나~ 를 느끼는 순간입니다.

너른 로비에 수십 년 보던 중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보여 관계자에게 물으니 지난 3년 간은 개미 하나 보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나의 최근작인 '
왜 교토인가?' 일어판을 들고 왔습니다.  한글판이 나와 일본인에게 보이니 자신의 이야기인데도 언어를 모르니 볼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몇 해에 걸쳐 일어판 1. 2 권을 내고 보니 한국에 그걸 볼 수 있는 분은 90이 되어야 했습니다. 최서면 강원용 피터현 백선엽 한운사 최창봉 신봉승 이어령 선생 등 힘주신 분들이 안보이니 손가락으로 꼽을 몇 분께 만 드리곤 동경을 온 것입니다.

일주일 내 하루 7. 8팀을 책으로 만나니 그리운 곳을 돌아볼 시간은 잘 없었습니다. 길 건너 일본 최초의 서양식 공원 붐비는 히비야를 한 바퀴 돌았고 뒷문으로 나가 긴자銀座를 걸으니 사람들이 몰리는데도 뭔가 기운이 달랐습니다. 

80년 대 어머니가 동경에서 단가 연구를 다시 하실 때 미국서 방문하여 차를 함께 들던 긴자銀座 욘초메 4정목 이층의 오래 된 찻집, 얼마 전에도 있었는데 없어졌습니다. 
그 길 건너 긴자의 핵심 위치인 WACO 바로 옆 여러 층에 걸친 Yamano 악기점의 악기들이 멋져 오카리나 작은 거라도 사곤 했는데 이사 갔는가 그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비자 낼 필요가 없어 사람은 늘어났으나, 어 이건 내가 아는 동경이 아닌데~ 지난 3년, 한국서 매일 보고 느낀 게 여기는 없겠지 막연히 생각한 게 잘못이었습니다. 허전해집니다.

그래도 반가운 만남들은 있습니다. 그들의 정은 여전했습니다.   그 중 두엇.

마에다 슌 前田 俊

그를 만난 건 오래 전. 내가 워싱톤 죠지타운대에서 공부할 때 동생이 뉴욕 콜럼비아대로 공부를 와서 주말마다 몇 시간 기차 타고 밥해주러 갔습니다. 일본서 유학 온 이가 거의 없던 때였는데 마에다와 현재 롯데 회장인 신동빈이 번갈아 찾아왔고 동생은 연애하러 갔는지 오질 않아 나와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그는 미츠비시 상사 출신으로 성공적인 투자 회사를 하는데 이번도 반겨주었습니다. FCCJ 일본 외신기자 클럽은 몇 해 전 내 시집의 출판기념회를 한 적도 있지만 클린톤 오바마 등이 글로벌 이슈로 외신기자들에게 스피치를 하는 곳입니다. 그리로 가서 관계자에게 신간 책들을 보이며, 일본에 온 외신 기자들은 '왜 한일관계가 안 좋은가' 에 관심이 있을 테니 이 책을 보이고 강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시라 말해줍니다.

마에다 슌 - FCCJ 일본외신기자 클럽 도쿄

하마구치 타이조 濱口 泰三

어머니가 진명여고를 나오자 우리나라 마지막 황태자비인 방자 여사가 동경에 유학을 보내줍니다. 
귀국 후로도 한참 후인 1965년에야 한일 교류가 이루어지는데 동창 중 하마구치 아줌마가 우리 집에도 오고 교류가 많았습니다. 일본의 지성인 나카니시 스스무 선생에게 어머니를 데려가 한국에서 비난을 받으면서도 유일하게 단가를 써오고 있다고 눈물로 호소한 것도 그입니다.

비자 받기도 어렵던 학생 때 국제 청소년회의로 동경을 갔고 마친 후 그 아줌마 댁에 며칠 묵은 적이 있습니다. 일어 한 개도 모르던 때 부엌에서 이 오이 호박 가지가 일어로 뭐냐고 물어 몇 개 외운 게 동지사 대학 가기 전 내 일어 실력이었습니다.

내 또래 아들 타이조에게 승신을 니코日光에 기차 타고 가 보여 주라고 해 같이 가기도 했습니다. 기차 탄 건 생각이 나나 니코 돌아본 건 생각이 잘 나지 않습니다. 몇 해 소식이 없어 연락을 하니 딸이 엄마가 지난 해 98세로 평안히 가셨다고 전해줍니다. 내 어머니보다 20년 더 사셨으나 못 보고 가신 게 아쉽습니다.

그렇게 타이조가 찾아왔습니다.
수 십 년 만이어 수수 백 명의 로비에서 찾는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52년 만이라고 52송이 붉은 장미와 고급 과자 상자를 잔득 들고 다가옵니다. 
별 것도 아닌 걸로 멋진 영화를 만드는데 이건 진짜 영화 장면 같다는 생각이 스칩니다.
만들어 온 약식 앨범을 펼치는데 당시 그 집 앞서 찍은 것과 니코에서 찍은 칼라 사진이 와~ 바래지도 않고 빛이 납니다. 

그 엄마가 만주에서 태어나 동경으로 와서 내 어머니와 같은 대학을 다니게 된 것, 당시 본 적 있는 그 아버지 이야기, 자신이 태어난 그 집을 3층으로 다시 지어 1층은 엄마, 2층은 누나, 3층은 자기 가족이  사는데 엄마 가시고는 1층도 누나를 주었다는 것, 아버지 사업도 누나가 이어 한다고 하며 자신은 돈이 더 필요 없다고 합니다. 

그래 그간 무얼 했냐고 하니 일본 굴지 기업인 이토츄 상사의 사장이라고 합니다.
사진 속 순수함을 여직 간직해왔다는 것, 장미 숫자의 발상 등 놀랍기만 하니 그런 생각 그런 디테일로 일해 왔겠구나 싶습니다.

52 송이 장미는 난생 처음 - Tokyo

참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어려서 '어린이는 미래의 기둥' 소리를 교장 선생님께 들은 생각이 납니다. 막연히 남이 기둥이 되어주는 게 아니라 어느 사회이건 우리 자신 하나하나가 참여하여 변화시킨다는 걸 새삼 깨우칩니다.

나라 밖으로 나오면 세상과 함께 호흡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이 좁다는 걸 알면서도
        나와 봐야 실감하는 것

         우리만 갖는 기쁨 슬픔 괴로움이 아니라
         다 함께
         고루 겪어왔다는 사실이
         힐링이 되고 위로가 되는

         동경의 긴자 4 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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