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ssay 이승신의 詩로 쓰는 컬쳐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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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2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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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7.13 14:37

오늘은 백선엽 장군 가신지 2년이 되는 날입니다.

후반부 10 년 이상 자주 뵌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끝의 6개월은 서울대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팬데믹으로 대면이 안되어 병동 건물 앞에 서서 기도를 했습니다.

장군과 마주하면 그 마음과 정신력이 제 마음에도 전해집니다. 이 시대 어른이 안 계신다

했는데 용기 백배 기운 백배를 백 년 간 고대로 가진 분이 이 땅에 계셨습니다. 그런 태도를

대하면 일반 거개가 원하는 소유나 권력이 삶에 무슨 소용인 건가, 존재가 다로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그를 대하면 군인이다 전쟁이다 그런 관념보다 '인간적이다'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참으로 인간적인 따뜻한 마음이었습니다. 전쟁터에서 부하들에게도 저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쟁기념관의 사무실을 쫒겨날 뻔한 서러운 시절이 있기도 했습니다. 
그 아픈 마음을 저는 보았습니다.
가실 때 마땅히 국장으로 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광화문에 세운 분향소에
매일 걸어가기도 했습니다.

군인으로 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군사전략이 능란해서가 아니었어. 휴머니즘, 인간
에 대해 더 진실되게 더 깊이 이해하려 했기 때문이야. 평양사범 다니는 동안 독서를 참
많이 했고 신문도 많이 보았지. 그러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르게 사는 것일까를 참 많이도 생각했어. 그러면서 세계를 보는 눈이 깊어지고 
넓어지는 걸 느꼈지. 대한민국의 미래 후손도 그런 자각과 세계관을 가지길 바래요
그건 장군과의 일대일 인생수업이었습니다.
'살아 온 많은 것이 유감이야~'  흉금을 털어 놓으시던 이 말도 들려 옵니다.
몇 해 울적하였던 장군님의 마음입니다.

시절이 바뀌어 대통령의 화환과 애도의 마음이 전해지니 국민의 마음으로 
받으시고 늘 하시던 나라 걱정 이젠 내려놓으시고 평안한 쉼 하시길 빕니다.


장군님 가신 2 주기에

이 승 신

 

 

 6 25 영웅 백선엽 장군                                                              2019 6 25 

 

 

 이승신의 로 쓰는 컬쳐에세이

 

  6 25 영웅, 백선엽 장군 

 

 

6 25 영웅 백선엽 장군님이 백세 되도록 살아계시어 기쁘다.

 

언제라도 와도 좋다 하신 장군님을 이리저리 빼다 가끔이나 뵙는데 6 25가 다가오면 절로 발길과 마음이 용산 전쟁기념관의 그 분 사무실을 향한다.

그 해 6월 25일, 북이 갑자기 남침하자 대한민국 최초의 장군이 되어 낙동강 다부동 전투 선봉에 서서 평양까지 밤낮을 걸어 용감하게 진격해 간 그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기 때문이다. 겨우 20대였다.

 

속으로 아버지의 DNA를 조금 느끼는 나는 여러 해 못 뵌 아버지가 몹시 그리운데, 지인과 동기가 더 남아 있지 않은 듯 해 아쉬웠다. 그러다 어느 날 전쟁기념관에 사무실을 둔 정일화 박사가 백선엽 장군이 아버지 나온 평양사범 출신이라며 나를 데리고 갔다.

 

동기가 아니어 내 아버지를 모른다 한다면 전쟁 경험이 없으니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걱정이 되기도 했었다.

 

아버지가 2년 선배라며 장군님은 나를 편하게 해주셨고 자상히도 아버지를 속속들이 이야기해 주어 그리움에 벅찼다. 그 분의 기억력은 대단해 이루 말로 다 옮길 수도 없다. 평양사범 때 이야기, 그 후 각기 다른 길을 갔는데도 아버지 일생의 역사를 일일이 다 기억하고 계셨다.

 

그 후 방문에도 묻지도 않는데 이 선생 아버지는 평양서부터 여러 방면의 탁월한 수재로, 만주에서의 교육과 교직, 서울에서의 관직, 사업 등 두루 두각을 나타내시고~ 내가 듣기 좋으라고 만 그러시는 것 같진 않았다. 90년 전 이야길 살아 계신 분에게 들으니 애잔하면서도 사모하는 아버지 생각에 잠기게 된다.

 

이번 만남에는 생의 많은 아쉬움을 표하신다. 말로 표현한 건 아니나 당시의 김원봉 사건, 걸핏하면 일부에서 장군을 폄훼해서인가 소침해 보이신다. 그저 마음으로 그렇게 느꼈다. 태어나니 일제 강점기, 거기서 태어나 공부하고 일한 것을 트집 잡는 것에 대응할 가치도 없지만, 자신이 지나 온 지고지난의 삶과 동족의 전투를 돌아보니, 그래서 소침해졌을 것이다.

'나는 일생 사람들을 구제하고 나라를 구하는데 정말 전력을 다 했어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맥아더 장군 워커 장군과 함께 한 사진은 물론, 해군 출신 새 미국 대사 해리스가 장군님 생신에 무릎 꿇어 존경을 표하는 사진들이 있는 사무실을 나와, 용산 내 드래곤 힐 랏지 식당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야기 중에 다시 또 '이윤모 선생은 수재 중의 수재로, 수재 부인을 만났고 그 사랑의 열매가 이 선생이다. 여러 좋은 일도 있겠으나 어려움도 있었겠지.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니 보상이 될 것이다. 그러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그것이 인생이지. 그게 인생이야' 자신의 백 년 인생을 돌아보며 하는 말일 지도 모르나, 다독여 주는 아버지 같은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뜨금했다.

 

한미동맹이 단단해야겠지요? 

ㅡ 70년 내 경험에 의하면 그 길 밖에는 없어. 안보 뿐 아니라 미국이 버텨주어 세계를 상대로 한 우리의 무역 투자 경제가 이만큼 이루어진 것이지.

 

일본과도 가까워야겠고요?

ㅡ 일본과는 너무 가까워도 안되고 멀어서는 더욱 안된다, 하시며 지나간 일본역사를 길게길게 이야기했다. 일본은 한때 육군은 독일처럼 강했고 해군은 영국보다 강했다. 그때 미국에 공격만 안 했다면 지금 더 대단할 건데~ 그런데 이제는 미국과 단단히 한 팀이 되어 앞으로 아시아와 태평양을 다스릴 것이다.

 

중국은 요 ?

ㅡ 중국은 워낙 커서 영원히 그를 따라갈 수는 없다고 본다.

 

장군은 이 순간에도 전쟁의 모든 체험, 작전, 군사 전략 모든 걸 알고 있는데 그것이 나라의 안보와 국방에 유용되지 못하는 것이 마냥 유감이라고 거듭거듭 말한다. 그 분을 뵐 때마다 브레인 기억력 마음 정신력 애국심은 나이와는 전혀 무관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존경하는 선배님의 영애에게 이리 조촐히 대접하여 죄송하다' 한 때는 용산 속 거기서 스테이크 드는 걸 부러워들 했는데, 늘 겸양하시며 내가 지난 세월 행여나 험란하게 살지는 않았을까 살피는 따스한 인간적 면모를 늘 보인다.

 

그리운 아버지를 어려서부터 가시기까지 그리도 세세히 알고 계신 분이며,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으로 되지도 못 했을 영웅의 손을 잡고 그의 육성을 바로 앞에서 듣는다는 것에 그 따뜻한 마음에 나는 늘 감격을 한다.

 

'또 와요~'

 

그를 뵈면 겸허해지고 자세가 바로 서게 되고 언제나 더 애국적이 되었다.

 

 

        방공호 속 앉은 채로 간 시체를 넘고 넘어 밖으로 나는 나아가네

 

                                              손호연의 6 25 단가

 

 

 

 

 6 25 전쟁 영웅 백선엽 현광언 장군  - 용산 전쟁기념관 201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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