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정문을 마주 하는 경복궁 북문을 불쑥 들어선다.
굵은 은행나무 가로수가 보기 좋게 늘어선 청와대 앞길은 자주 걸으나 그 우편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은 오랜만이다. 티켓 박스에 아무도 없어 이상하다 했더니 매달 마지막 수요일은 무료여서라고 했다. 그렇게 시민생활을 격려하는데도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늘 보는 사람에게 그러하듯 늘 눈에 들어오는 풍경도 그러려니 하거나 언제든 갈 수 있는 건데 하며 뒤로 미루는 경향이 있어 이조 시대 왕궁인 경복궁이 집 근처이고 어려서부터의 추억들이 있음에도 잘 가게 되질 않았다.
1395년에 건립된 경복궁 안에는 500동의 건물이 있었다는데 일제시대 많이 철거되었고 조선총독부가 있기도 했다. 지금은 헐렸지만 중앙청이라 부르던 그 건물 홀에서는 부모님이 드물게 결혼식을 하기도 했다.
그 안의 경회루 연못 앞에 늘어선 십여 그루 수양 벚꽃은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봄에도 때를 놓쳤다.
청와대를 배경으로 한 북악산의 위용을 바라보며 그렇게 지나치기만 했던 둥근 신무문을 들어가 왼편 쪽문을 들어서면 고종황제가 서재와 외국 사신 접견소로 썼다는 집옥재와 팔우정이 보인다. 현대식 아파트는 몇 십 년에 허무는데 2백 여 년 된 이런 목재 건물은 지금도 건재하다는 게 신기하다. 시멘트 콩크리트 철근 없이 지어진 걸 바라보며 당시의 선조들을 생각한다.
그런데 화창한 봄 날씨에 더 눈을 끄는 건 집옥재 우편에 펼쳐진 목단밭이다. 아름답기도 하지만 와~ 그 향기가 너무 좋아 나를 끈다. 누군들 좋아하지 않겠는가만 나를 기르신 외할머니가 특히 좋아하시던 꽃이다. 목단은 이 빛이 귀한 거라며 의걸이 장에서 새 지폐를 꺼내고 손수 심으시던, 학교도 가기 전 어려서의 기억이 인상 깊다.
덕수궁의 목단밭이 있는 건 알았는데 경복궁 북쪽의 목단꽃 무리는 처음이다. 기대 안 한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이 놀랍기만 한데 그 향기가 내 발길을 잡는다.
친구들에게 사진을 보내며 색도 유난히 좋고 향이 기막히다 하니, 목단은 향기가 없는데~ 라고들 한다. 폰이 향기도 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윽하고 은근하며 아주 고급 진 향이다. 16만 평의 너른 터 산책하려 들어왔는데 그 꽃밭에 끌려 그만 주저 앉게 된다.
부귀의 상징이요 옛 예술 작품에 많이 나오고 중국이 극히 사랑한다는 목단은 모란이라고도 하는데 연 핑크와 하얀 색도 순수하여 좋으나 자주색이 귀하고 품위가 돋보인다. 벚꽃처럼 곧 져 내리는 건 아니나 다음에 오면 꼭 사라져버렸을 것만 같아 눌러 앉아 그 자태와 향과 그 분위기를 맡는다.
어머니 생각도 난다.
필운동의 300년 넘는 고택이 뭉턱 잘려 나가 새로 지어야 하는데 수 십 년 살아온 짐은 많고 당장 갈 곳이 없어 고민하던 중 어머니를 존경하는 애독자가 구기동에 있는 빈 집을 빌려주게 된다. 북한산 초입으로 앞으로는 시내가 흐르고 눈을 들면 산 정상의 사모바위가 보이고 너른 정원이 있었다. 라이락 등 몇 가지 꽃이 있는데 내 생일이면 모란꽃을 한아름 따서 안고 오셨다. 향 좋은 자주 빛이었다.
5월에 피는 걸 알아, 가시고는 덕수궁의 목단 무리를 보러 가기도 했다. 그러던 게 우연히 아무 계획도 없이 경복궁을 들어와 자주 빛 목단꽃을 이렇게 잔득 보게 되다니 신기하기만 하다.
그러나 생각하면 그건 우연이 아니라 누군가 나에게 그 꽃의 순간을 보이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든다. 내게는 보이지 않으나 누군가 힘내라고 응원하는 신호일지 모른다.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의미있고 깊었다.
명성왕후가 일본 자객에게 살해된 묵직한 역사의 집 곤녕합 담을 끼고 피어난 최상의 아름다움을 선물 받는 오늘은 5월 7일 내 생일이다.
생각하면
생일이란 태어난 사람보다
고생하며 낳으신 분의 날
그 분에게 사랑을 받기만 했네
이 승 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