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ssay 이승신의 詩로 쓰는 컬쳐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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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버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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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27 19:20

 


 문경새재                                                                        2021  11 20

   

 이승신의 로 쓰는 컬쳐에세이

 

 두 아버지 이야기 

 

예년이라면 설악산 하룻밤을 가고는 교토를 향했을 것이다.

둘 다 못 간 채 서울이었다.


서울과 중부는 단풍이 끝물이라는데 시조 시인 선배의 초청으로 후배 둘과 중부인 충주를 가게 된다. 매끼를 정성으로 대접하였고 수안보 온천 호텔도 잡아 주었다.


아 수안보라~ 20 년이 훨 넘었다

미국에서 방학에 오거나 아주 귀국한 후에도 어머니와 함께 장호원 큰 산에 혼자 계신 아버지 산소를 찾았었다.

 

               '산소의 잡초만 뽑노라 가신 님 위할 길 달리 없으니'


    '우리 둘 맺어지고 사십 년이 못 되는데 그대 잃고 잊기까진 백 년 천 년'


한국에서 일생 지은 어머니의 시가 '일본 열도를 울리다' 라는 큰 반응으로 나타나게 된 것은 아버지 가신 후 그 시들이 담긴 '무궁화 4' 편의 영향이다. 어머니가 유명해지는 대신 아버지가 살아 계시길 내가 원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많은 분이 내가 만든 한국어 판을 보고도 일편단심 사랑의 그 마음을 칭송했는데 이름 있는 방송 후배 PD가 그랬다.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한 분이면 그리 끝없이 그 마음이 표현될까 라고.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아버지 어머니 두 분 중 어느 쪽 때문에 그리도 좋은 관계였을까. 한 쪽만 좋아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참 어른이 되고 세상의 많은 것을 둘러보고 나서 연거푸 생각해봐도 객관적으로 양쪽이 고루 훌륭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내가 본 아버지는 이 땅에서의 생명의 길이만 빼고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는 생각이다. 백세 백선엽 장군도 '모든 분야에 탁월한 평양사범 선배님을 존경한다' 고 늘 말해 주었다.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산을 내려가네 적막한 산에 그대만을 남기고


산소 앞에선 풀 뽑는 거 밖에 할 게 없었다. 어머니보다는 아버지의 DNA를 느끼는 나는 어머니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으려 슬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 

적막강산에 남기고 내려와 수안보로 가서 산채 비빔밥 몇 수저 뜨고는 온천에 들었었다. 가끔 근처 고사리 마을에 계신 김옥길 이대 총장을 찾아뵙기도 했다.


괜히 위한다고 큰 산을 구해 모셨는데 저 아래 공동 묘지는 외롭지 않을 텐데~ 안타까워 하셨을 어머니도 이제는 합장하신지 20 년이 되어 간다. 

수안보에 머물며 그때 엄마와 함께 하던 생각을 어제인 듯 떠올린다.


선배가 잎 진 월악산 등 여기저길 보이는데 문경새재 한 나절 걸은 것이 인상에 깊다. 많은 단풍이 졌는데도 새재에는 몇 그루가 남아 햇빛을 받아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붉은 빛이 눈부시다.

과거 보러 한양에 가려면 이 문경새재를 넘어야 했다. 선비인 듯 자세를 펴고 그 길 따라 걷는 것이 상쾌하다. 한 해에 드문 화창한 빛이 너른 주위 경관을 아름답게 했다. 


한참을 걷자 우편 커다란 현판에 대성산업 사유림 이라 했고 그 아래 '자연 생태계 청정림 지역으로 후손을 위하여 영구히 보존한다' 고 쓰여져 있다. 주흘산으로 걷고 있는 길고 긴 이 길이 사유지라니.


아 수십 년 전 기억이 어슴프레 난다. 어려서 친구에게 그 이야길 들었었다. 같이 간 후배는 사유림이라 쓰여 있는데도 국립공원이라고 우겼다. 엄청난 산덩어리로 사유지라는 걸 상상할 수 없어서다.


대구에서 막 전학 온 중학교 친구 돈암동 집엘 갔었다. 친구 아버지가 방에 들어오시더니 '아버님 이름이 뭐냐?' 어린 나는 누구에게 그런 질문을 처음 들었고 대구에서 이제 오신 분이 아버지 이름을 댄다고 알 리가 있나~' 하면서도 답을 했다. 그랬더니 '아 내가 잘 아는 분이다' 하며 반가워 하신다. 그 환한 표정을 지금도 기억한다. 한참 후 생각하니 평양서 서울 오시어 고등고시 치고 시작한 것이 상공부 연료과장이었고 친구 아버지는 대구에서 석탄회사를 하실 때니 아시는 것일 게다. 당시도 세상은 좁았다.


그렇게 가끔 뵈었고 늘 만면에 웃음을 띄우며 듣기 좋은 음성으로 품이 참 넓은 분이라는 인상이 있다. 말년에는 모녀시인의 집이 길로 많이 잘려나가고 일층이 세가 오래 안 나가 예술공간을 짓고는 그 안에 국내 최초 프렌치 레스토랑까지 있었는데 우리 집인지도 모르시며 아들들과 자주 오셨었다.


바로 그 아버지가 광산을 하려면 갱목이 필요하여 산림녹화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52년 전 문경새재가 있는 주흘산을 구입하고 민둥산이 된 나라를 위해 산림사업을 하는데 일생 힘을 쓰신 것이다. 그렇게 가꾸어져 입장료도 없이 많은 사람이 걷고 누리고 있다. 그 산하는 내 눈에도 국제급이어 국내 관광 1위라는데 그 속 의미까지 생각하니 가슴이 찡해 온다.

 

한 분은 평양과 만주에 계시다 서울로 오셨고 또 한 분은 대구에서 서울로 오신 차가 있겠으나, 빈 손으로 시작한 파란만장의 한 시대를 온 몸으로 개척해 오신 것과 훌륭한 인품으로 다 자기 분야에서 대성을 이루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태어난 목적을 분명히 알고,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오며 나라 위해 훌륭한 흔적을 남기신 두 아버지를 그려보는 귀한 시간이었다. 

 

  




















  문경새재   2021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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