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애미 悲哀美
친구들과 덕수궁 돌담길 바로 옆에서 점심을 약속했을 때부터 점심 후 함께 덕수궁내의 전시를 보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 말에 찬동들을 했는데 이야기가 4시가 되어가자 다 가버리고 혼자 그 돌담길을 끼고 걷다 큰 데모를 막는 엄청난 수의 전경들을 헤치고서야 덕수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실로 오랜만이다 덕수궁 뒤 광화문 쪽에 있는 덕수국민학교를 다녀 그 이름이 익숙하고 아주 어려서 할머니 집에 있었는데 오랜만에 보는 젊은 엄마가 좋아 입이 벌어지며 모란꽃이 활짝 핀 덕수궁에서 그 엄마와 같이 사진을 찍은 것이 늘 기억에 새롭다 고종의 거처이다가 이왕가 미술관으로 그리고 1973년부터는 국립 현대미술관이 되었는데 문공부 보도국장을 오래 지낸 손석주 외삼촌이 그 미술관장이어 거기에서 뵌 적이 있는 등 많은 추억이 있는 곳이다 그 곳을 찾은 건 일본인 수집가로 유명한 야나기 무네요시 柳宗悅 1889-1961 의 수집품 전시를 보기 위해서이다. 야나기 논문으로 학위 받은 분의 이야기를 들었고 예술을 통해 조선을 사랑하고 그 일상의 물건을 수집했던 이야기와 글을 보았었다 수집 이외에는 무슨 일을 했을까 궁금했었는데 수집을 무슨 한낱 취미로 보는 이의 무지였고 동양 서양에 걸친 방대한 수집과 그 연구와 이론 전개, 보존 관리와 저술과 알림, 그 자체가 대단한 ‘창작 행위’요 ‘창작하는 수집’임을 이번에 느끼게 된다 1914년 조선의 일본 친구 아사가와 노리타카에게 조선 도기를 하나 받으며 순식간에 그 매력에 마음을 빼앗겨 그걸 만들어낸 조선인들에 대해 한없는 경애의 마음을 가지고 조선의 물건을 몇 나라 수집 2만점 중 2천 점이나 모으게 된다 고급 백자나 비싼 가구가 아닌 서민이 쓰는 도기와 일상의 용품들로, 아무도 그런 걸 거들떠보지 않았던 때였는데 아름다움을 보는 그의 앞선 안목과 심미안이 놀랍기만 하다
민예의 개념이 전혀 없는 때에 그 이론을 세우고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사용하는 일상적인 것의 가치를 통해 내일의 창조를 이끌어가는 시도를 했다 도기는 물론 갓 신 치마저고리 산 능선까지 조선의 선에 감탄한 그는 조선의 아름다움에 스며있는 슬픔을 느끼며 그것을' 비애미'라고 했다
저술을 통해 ‘조선의 친구에게 보내는 글’ ‘조선과 그 예술’ ‘사라져가려는 한 조선의 건축에 대하여’ ‘조선민족 미술관의 설립에 대하여’ 등을 쓰며 조선민족의 뛰어난 문화가 사라져가는 것을 우려해 조선 사람을 대신해 미술관 건립을 결심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조선의 예술로부터 받은 은혜와 의리를 보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선민족 미술관을 경복궁에 건립하며 일본 총독부로부터 민족이라는 두 글자를 지우라는 명령이 있었으나 끝까지 타협하지 않았다. 미술관 설립 목적이 단순히 조선의 공예품 수집 전시가 아니라 글에 썼듯 ‘나는 조선민족 미술관이 사라져가려고 하는 민족 예술의 사라지지 않는 지속과 새로운 부활로의 직접적인 원동력이 될 것을 갈망한다’ 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민족문화 보존을 주장하여 경복궁의 광화문을 부수려던 총독부의 계획도 무마시켰는데 그 후 6 25 적에 불이 났고 최근에 와서야 새로 짓게 된 것이다 오래 전 런던 한복판에 높이 서있는 웰링톤 Arthur W Wellington 제독의 동상을 보며 영국 친구가 설명하는데 그가 세계 2위의 해군 제독으로 1위는 이순신이라고 해서 놀란 적이 있다. 우리는 지금도 그가 세계에서 최고로 알아주는 제독인지도 모르고 있고 30년 전은 더구나 유럽이 코리아를 잘 모를 때인데 그리 된 것은 일본이 불패의 장군 이순신을 연구하여 세계에 알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매번 패하게 한 남의 장군도 그 위대함을 세계에 알리는데 우리도 일본의 훌륭한 사람들에 대한 연구와 배움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 나부터 야나기 무네요시의 70여 년 짧은 생에 이루어 낸 그 업적에 큰 지적 자극이 되어 어디서 그런,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는 탁월한 안목이 오고 수집에 그치지 않고 연구, 저술 그리고 “신비한 비애미”를 세계에 알려온 그를 알고 연구하고 싶어진다 참된 아름다움을 나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민예라는 개념을 야나기가 첨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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