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골 공원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실로 40여 년 만의 일이다.
3 1 운동이 시작된 곳이고 서울 한복판의 실버타운 곁이어 노인들의 집결지로 알려져 있는 것이 그 곳으로 가면서 떠오른 이미지다.
초가을이 시작되는 9월의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1901년 9월 7일은 고종황제가 독일의 지휘자 프란츠 에케르트 Franz Eckert를 초빙하여
악기를 가르치게 했고 양악대를 만들어 첫 서양 음악회를 탑골공원에서 연 날이다.
그것이 117년 후,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음악이 마침내 펼쳐진 것이다.
걱정부터 되었다.
외교 사절들이 꽤 와서 영어와 한어로 사회를 맡게되어서도 그러하나 1901년 무렵의 역사가 생소해서였다.
벼락치기로 공부해 보나 머리로만 들어 왔지 가슴으로 느껴지는 건 아니었다.
큰 기대를 안하고 내가 책임진 것만 제대로 되어지기를 바라며 갔다.
아 그러나 나는 그 저녁 거기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다할 때까지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우고 깨우치게 되었는지 모른다.
손병희 선생과 김구 선생의 동상이 크게 서 있고 가설 무대 뒤로는 오래 된 소나무가 역사를 말해주고 있으며 그 뒤로 파고다 탑과 팔각정이 우뚝 서 있었다.
바로 그 장소에서 무려 117년 전 고종황제의 칙령으로 양음악이 시작된 것이다.
애써 서양에서 음악가를 초빙해다 양악대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대한제국의 국가國歌를 짓게 했다. 11 나라와 수교를 맺었고 수교와 외교 행사가 있을 때마다 상대국의 국가를 연주하게 했다. 백년도 넘어 전, 예술외교의 발상을 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당시에 전기도 전차도 우리가 일본에 앞서 놓여졌다고 한다. 그런 신문명으로 나라의 번영을 고종은 꿈꾸었을 것이다. 외국과 수교하면서는 평화를 꿈꾸었을 것이다.
일본에 나라를 잃어가는 시기로 고종의 이미지는 무능에 가까웠었는데 그의 나라를 위한 생각과 고뇌하는 마음이 내 가슴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둠이 내려앉고 조명이 소나무들을 아름답게 비추이는 역사적인 분위기와 오케스트라가 들려주는 당시의 음악이 그런 생각으로 나를 이끌었다.
실로 역사와 음악의 깊은 만남이었다.
대한제국의 애국가가 울려 퍼진다. 숙연해 진다. 우리나라의 첫 애국가이다.
그리고 당시의 11개국 중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태리 5 개국의 국가國歌가 그 나라의 영상과 함께 울려 퍼졌다. 각국의 대사와 외교사절들이 일어섰다.
심한 더위가 언제였냐는 듯, 초가을의 날은 선선했고 밤하늘의 달빛이 대도시 한복판 야외공간의 천석의 관객에게 스며들었다. 하나같이 애국하는 마음의 표정이 되었다.
백곡도 넘는 우리의 애국가 중 세곡을 다 함께 부를 때는 그 절절한 애국적 가사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고종황제를 굽어 살펴주소서' 후렴을 부르며 마침내 우리는 울었다.
나는 그 모임과 예술 행사가 우리를 그렇게 애국적인 마음으로 돌려놓을지를 전혀 모르고 갔다. 허나 내가 하는 역사와 음악의 멘트에 나 자신이 점점 그런 마음이 들어 절로 기도하게 되었고 관객도 그렇게 되어 우리는 한 마음이 되었다.
고종의 고난과 수난은 그대로 민족의 수난이었다.
나라의 운명이 시시각각 일본의 식민지로 되어갔고 매주 목요일마다 그 곳에서 양악이 울려퍼져 시민의 큰 화제를 몰고 다니던 양악대도 결국은 해체되고 만다.
그것이 무려 117년 만에 이렇게 재연되니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간 음악회를 백여 번 직접 기획 진행해 왔으나 깊은 역사와 함께 한 이번은 내게도 감동이었다.
송재용 지휘자의 '뉴코리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앵콜을 듣고도 감격한 관객은 떠날 줄을 몰랐다. 이번 1회에 그치지 않고 고종 때처럼 계속되어져야 한다고 한 마음으로 말했다. 서울 시내 복판에 새겨져 있는 우리의 그런 자랑스런 역사가 늦게나마 새로운 역사로 잉태되었다.
117년 전의 역사와, 고종황제는 물론 당시 선조들의 스피릿이 우리와 분명히 함께 했을 초가을의 뜻 깊은 밤, 누가 뭐래지 않아도 우리 모두는 나라를 위해 평화를 위해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