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정원
이 곳은 지금 그야말로 만추, 무르익은 늦가을이다.
내가 사는 곳에서 전차를 타고 10분 남짓, 이치죠지 一乘寺에 내리면 옛 마을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고 작은 골목에 유서 깊은 여나믄 사찰들과 전설의 무사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 가 그 아래에서 결투를 했다는 한 그루의 소나무가 나온다. 거기에 시센도 詩仙堂 '시인의 정원'이 있다.
몇 해 전 우연히 그 이름을 접하고는 가슴이 뛰었다. 일본 정원은 사찰이나 신사神社, 천황과 다이묘大名의 몫인데 '시인의 정원'이라니. 물어물어 찾아갔고 그 정원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대나무 검소한 문을 밀고 들어가 대나무 양벽으로 난 돌계단을 올라가면 다다미 방이 나오고 그리 들어서 소리 죽여 가만히 앉으면 다다미에 이어진 툇마루가 보이고 문 없이 확 트인 앞 정원이 한 눈에 들어 온다. 아담한 이 정원이 왠지 정감이 가고 끌리며 정성스레 지은 공이 깊숙이 느껴진다.
무리진 철쭉꽃으로 5월의 정원이 특별하고 등나무가 늘어져 있으며 한 여름의 신록이 상쾌했으나 이 늦가을, 오렌지빛 단풍도 그윽한 깊은 맛을 준다.
이 정원을 직접 지은 이시카와 조잔 1583- 1672 은 16세에 이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최측근에서 도운 유명한 무사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이 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무찌르는데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는 물러나 히로시마에서 어머니를 모신 효자였고 그 어머니가 돌아가자 교토로 와 59세에 이 곳에 '시인의 집'을 지은 것이다.
한가지에 뛰어나면 다른 것들도 잘 하는가. 무술 뿐 아니라 시와 학문에도 탁월한 그는 경관 건축가로도 뛰어나 언덕받이를 잘 활용한 변화와 세심한 조화의 정원이 편안하고 아름답다. 이층에는 달을 바라보는 작은 방도 있다. 달을 바라보는 방이라니 얼마나 시적인가.
중국 시를 흠모하여 36명 중국 시인의 시와 초상을 그렸고 그 액자들이 주실主室에 걸려 있다. 그래서 시센도詩仙堂라는 이름이 붙쳐졌다. 이런 아름다운 정원을 지은 시인이 흠모한 시라면 그 내용을 알고 싶은데 옛 글이기도 하지만 멋지게 흘겨 쓴 것을 알아보지 못함이 안타깝다.
방 입구에는 영국의 Charles 황태자와 Diana 황태자비의 언제적 방문 사진이 유일하게 걸려 있다. 교토의 수많은 명찰을 두고 다른 곳에 비해 자그마한 이 '시인의 정원'을 Charles 황태자가 방문한 것은 왜일까. 누가 추천했는지, 자신이 오래 전 동양 시인의 향취를 맡고 싶었던 거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동양의 고요한 정원에 한장의 사진으로 서양의 향취 한 점이 스며드는게 신선하다. 우리는 그들의 현재를 아나 그들은 자신의 미래를 전혀 모르던 싱그러운 왕자 공주 시절의 한 순간을 그 곳에 가면 그렇게 슬쩍 보게 된다.
안쪽 문의 맞은 편에는 하얀 모래를 깐 앞뜰이 펼쳐지고 흰 모래를 빗질로 낸 아름다운 선이 문양처럼 그려져 있다. 벗은 신을 다시 신고 백사를 지나 몇 걸음 내려가면 작은 폭포가 얕은 연못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그 폭포 소리와 함께 대나무 물받이에 떨어지는 물소리가 시내임에도 깊은 산사에 와 있는 듯 고요한 분위기를 돋구어 준다.
1641년에 지어진 이 시인의 집과 정원은 이시카와 조잔이 30년 이상 정원을 가꾸며 시를 짓고 예서와 한시의 대가가 되어 화려했던 무사의 삶을 뒤로 하고 90 까지 당대 최고의 문필과 예술인들을 맞으며 조용히 산 곳이다.
400년 후에도 시인의 시심詩心과 기氣는 그가 지은 정원에 맴도는가. 가슴 속 깊이 숨겨져 있는 시적 감흥을 이끌어 내기 꼭 알맞은 사랑스런 공간이다.
이 정원만큼은 나만이 아는 비밀의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시로 지은 정원에서 고요를 듣다
가슴 속 깊숙이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태고적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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