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2017 11 19
왜 교토인가?
아 교토의 천년 넘는 역사와 그 자취가 담긴 공간을 생각할 때에 교토를 한 줄로 정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천살을 살아보지 않는 이상 그것은 코끼리 다리와 긴 코의 일부를 만져보는 셈일 것이다.
그러함에도 우리와 지리적으로 심적으로 극히 가까이 있는 그 도시의 실존과 의미와 가치를 나는 지금 떠올려 본다.
비자받기도 어렵던 1970년 학생 때 ‘국제 청소년회의‘로 동경을 갔고 관방장관과 당시 일본정부 인사들과의 교류 후 오사카의 아버지 지인의 어린 딸과 기차를 타고 한 나절 교토를 간 적이 있다. 교토의 역사나 문화의 지식이 없던 때 그 시가지의 긴 길을 걸었던 것이 교토의 나의 첫 기억이다.
그 후 미국의 긴 삶이었고 시인 어머니의 출판기념회와 국제회의, 강연 등 일본을 찾은 것은 주로 동경이었다.
2005년, 일본 문화부 주관으로 어머니를 기리는 한일문학 세미나가 교토에서 있었고 짧은 시간의 만남에도 감명을 받았다. 교토의 첫 방문 후 35년이 지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어머니 가심으로 철이 좀 들었다고나 할까 주위 사물이 깊이 있게 다가왔다.
그 후 회의 등 기회있을 때마다 교토를 찾았고 나를 끌어당기는 건 무엇일까 생각하며 교토를 마주했다. 수많은 사나흘의 짧은 시간이었다. 마주치는 서양인들은 별세계 같다, 동화 속 같다 하며 반했지만 같은 동양권에서 온 나에겐 뭔가 먼 세상에서 살아 본 듯한 가슴 속 아득한 고향 같은 느낌이었다.
짧게 머물며 길 건너 천황이 살던 고쇼御所와 그 맞은 켠 동지사 대학을 자주 산책했다. 봄꽃 아래, 말을 걸어온 이에게 이런 아름다운 곳에서 공부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니 입학 신청서 내는 곳을 인도했다. 그것이 우연인지 기연인지 한국과 미국이 문화 배경인 사람이 일본문화에 겁도 없이 뛰어든 것이다. 2015 2016년 교토의 동지사 대학 만학이다.
70년 전 동지사를 다닌 윤동주 시에 나오는 그야말로 좁은 육첩방에, 좀 안다고 생각한 일본은 전혀 외국이었고 얇은 일어 실력으로 하는 공부는 벅차기만 했다. 집으로 돌아가고만 싶은 정말 외롭고 힘든 날들이었다. 그러나 내 인생 일찍이 다닌 그 어떤 학교보다 밤을 밝히며 매진하여 스무 과목을 통과하고 나니 그것은 필연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그 공간에서 배우고 깨우치고 알게 된 것을 나만 간직할게 아니라 일본에 가보았으나 여전히 일본을 막연히 알고 있는 분들에게 알려줄 사명이 나에게 있다는 생각을 했다.
1100여 년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 그 곳은 일본인 모두의 '마음의 고향'이요 일본미의 핵심이며 소프트 파워의 위력을 전 세계에 단단히 보여주는 곳으로 그 묘한 매력은 한번 온 사람을 반드시 다시 오게 만든다.
알다시피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멸하여 움직일 수 있는 백제인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하고 아스카 나라를 거쳐 교토에 정착하며 도시를 형성하고 나라를 이루어 가게 된다. 글과 학문, 종이와 인쇄 기술, 정원과 토목기술, 불교와 불교건축 등 한반도의 많은 문화와 문물이 전해졌으며 이주해 간 백제의 왕족과 귀족과 지성인은 그 마음을 정신문화의 꽃인 한 줄 시 단가로 표현하게 된다.
그때의 단가 시를 모은 일본 최초의 문학인 '만엽집' 연구의 대가에게 들은 그런 이야기를 가슴에 두며 그들이 그런 사실을 모를 적마다 알려주었고 교토의 3천개나 되는 사찰 중 명찰을 볼 때마다 관계자에게 지은 역사를 물으면 으레 1200년 전요 천년 전요 800년 전요 라고 하여 속으로 흡족해 하며 그렇다면 이건 백제에서 온 장인과 그 도래인들이 지은 것임에 틀림없다고 말해주면 그들은 그런 사실을 처음 듣는다고 했다. 아 이들은 그런 역사를 배운 적이 없구나 생각하며 열을 다해 그 배경을 설명해 주었다.
단풍철의 한 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집인 고다이지 건축과, 면경보다 더 면경같은 그 연못에 새빨간 단풍이 비친 절경에 감탄하는 프랑스 부부에게 당신들이 감탄하는 교토의 문화는 코리아가 천 년 전 지어주고 전해준 것이라고 긴 역사를 말했다. 산넨자카를 오르다 나란히 돌계단에 앉은 영국 처녀가 꿈만 같다며 신음할 제도, 오래 묵은 이 양켠의 집들과 조금만 더 오르면 절벽 위의 또 다시 감동할, 못 하나 박지 않은 웅장한 건축, 기요미즈테라淸水社도 고대 백제인이 지은 것이라고 했다. 선진국에서 온 이들이 입을 벌리고 감탄하는 것을 보면 참다가 그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나흘만 계속 교토에 갔다면 나는 그 설교를 지금도 하고 있을 것이다. 천 년너머 유장히 내려오는 역사에 둘러싸여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깨우치게 된다. 백제 뿐 아니라 일찍이 한반도에서 간 우리의 선조와 그 후손이 짓고 만들고 가르쳐 준 것은 사실이나 그 역사와 전통을 전수하고 연구하고, 새것을 위해 부수지 않고 명맥을 끈질기게 유지하고 이으며 그들 고유의 문화로 승화시켜온 그 대단한 성취와 노력 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고 더 이상 선조이야기는 꺼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비록 현해탄을 건너가서 그런 위대한 문화를 이루었으나 우리의 피를 나눈 조상으로 그런 DNA가 우리 속에 있는 거로구나 하는 깨우침에 전율하며 나는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게 된다.
일찍이 유럽 문화를 접하며 우리 조상은 대체 무엇을 했는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작아진 적이 있다. 그런 문화를 이룬 유럽인들이 교토의 고대 건축과 정원과 예술에 감동하며 우리가 전해준 짧은 시에 빠져 그런 풍의 단시 붐을 일으키는 걸 보면 천 년 전 우리 선조에 대해 새삼 자랑스런 마음이 든다.
그렇다. 우리는 그런 조상을 가졌다. 자신감과 자긍심을 곧추 세우고 한탄만 할 게 아니라 이제부터라도 그 유전자를 더욱 끌어내고 노력하여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우리 후예에게 그걸 넘겨주어야만 한다.
교토를 걷다보면 한국말이 많이 들린다. 아 아름답다는 말도 하지만 이렇게도 깨끗하고 상냥하고 정직하고 철저 꼼꼼하고 상대를 배려해주는 사람들인지 몰랐다고 한다. 한국에서 듣던 이야기와는 다르다.
양국의 관계는 2천년을 넘어선다. 좋은 선린이었다. 어려웠던 시기는 임진왜란과 근대 35년간의 일제 강점기였다. 혹자는 일본이 대국이니 사죄하고 덕을 보여야 한다고 한다. 사과를 하고 안하고는 그들의 몫이다. 우리는 우리의 할 것을 하면 된다. 교토의 긴 역사를 떠올리며 나는 우리가 형이요 대국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형의 큰 마음을 가지고 포용하고 겹치는 조상을 가진 이웃나라로 우리는 서로 손잡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보다 많은 한국 사람이 교토를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사라진 먼 옛 고향이 느껴질 것이며 천 년 전 그 도시와 문화를 만드는데 헌신한 백제인과 고구려 신라 고려 가야의 우리 선조의 영과 혼이 느껴질 것이고 그리하여 새삼 앞날의 한일관계를 깊이 생각하게 될 것이다
“왜 교토인가?” 거창한 제목을 세웠으나 동지사 대학과 그 수업, 거기에 시비로 서있는 정지용 윤동주의 스피릿, 내가 만난 환상의 봄꽃과 딴 세상만 같은 단풍잎 세상, 나만 알고싶은 교토의 명소, 나에게 감동을 준 인물 그리고 동경 아오모리 아키타 게센누마 시라가와고를 보태어 시인의 앵글로 본 잔잔한 이야기를 펼친다.
이제는 일본을 좀 더 알고 지난 2천 년의 '보다 높은 차원’의 선린관계로 회복되기를 소망한다.
동아시아 끝자락에 살아 온 나, 오로지 평화만을 기원했네
손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