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가족과 친구 여러분께도 축하를 드립니다.
여러분은 2016년에 도시샤대학을 졸업합니다. 올 해처럼 서기西紀가 4로 나눠 떨어지는 해에는 세계에 2가지 큰 일이 있습니다. 하기 올림픽, 그리고 미국 대통령 선거입니다.
올 해 8월 5일부터 21일 동안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하기 올림픽이 개최되며 우리 대학에서도 재학생이나 졸업생이 출정할 예정입니다. 많은 성원을 보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4년 후인 2020년에는 도쿄에서 2번째 올림픽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 때 여러분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이렇게 하고 싶다, 이렇게 되고 싶다고 이미지를 그려 보세요.
그것이 실현을 위한 첫 걸음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첫 번째 도쿄 올림픽은 1964년에 개최되었습니다. 패전국이던 일본이 일본에서 첫 번째일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 처음 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게 부흥, 성장한 것을 세계에 보여주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급속한 경제 성장의 파도를 타고 있었고 그 4년 후인 1968년에는 서독을 제치고 드디어 미국에 이은 세계 제 2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습니다.
큰 사회적・경제적 변화 속에서 올림픽 개최 당시의 수상이던 이케다 하야토 池田勇人는“관용과 인내”를 슬로건으로 들었습니다. 물론 경제 성장이나 물질적인 풍부함만이 전부가 아닙니다만 첫 번째 도쿄 올림픽 전후로는 그러한 것들이 명백한 내셔널 골이었습니다. 2번째 올림픽에 임하여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올림픽을 넘을 내셔널 골을 다 그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음의 내셔널 골, 더 나아가 내셔널한 테두리를 넘는 골을 그리고 추구하는 것이 여러분 세대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한편 미국 대통령 선거가 갈수록 격해지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의 민주주의적인 판단을 기다릴 수 밖에 없습니다만 워낙 일본에 있어서 세계에 있어서 중요한 초강대국에 관한 일이다 보니 일부 후보자가 이민 배척 등 과격한 주장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걱정이 됩니다. 아마 그 배경에는 빈부격차나 인종, 종교, 젠더 등 사회의 다양화에 대한 사람들의 불안이나 초조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질異質한 것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은 유감스럽게도 유럽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은 구미처럼 많은 이민이 없으니 이민 배척론이 없습니다만 그만큼 다양성에 대해서는 둔할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일본에서도 서로 다른 의견이나 입장에 대한 관용의 정신이 후퇴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관용과 인내”의 관용 즉 tolerance 입니다.
여기에 한 에세이를 소개합니다. 도쿄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강의한 와타나베 가즈오 渡辺一夫의 에세이입니다. 와타나베는 소설가인 오오에 켄자부로大江健三郎의 은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관용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불관용에 대해 불관용이 되어야 하는가”라고 와타나베는 묻습니다. 와타나베에 의하면 인류의 긴 역사는 관용과 불관용의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종종 관용은 불관용에 패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불관용이 공격적인 반면 관용에는 단2가지 무기 즉 설득과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반성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다 위험한 것은 관용이 불관용과의 싸움 속에서 어느 덧 스스로도 불관용이 되고 마는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와타나베에 의하면 고대 로마는 종교에 지극히 관용한 사회였는데도 원시 기독교가 자기만이 올바른 종교이며 하나님에게 통하는 삶이라는 불관용을 보여줬기에 로마에 의한 박해라는 불관용을 유발했다는 것입니다.
“관용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불관용에 대해 불관용이 되어야 하는가”
와타나베의 답은 “아니다”이고 우리는 어디까지나 관용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최근 글로벌화라는 말을 너무나 자주 듣습니다. 이 글로벌화란 영어를 말하거나 해외에서
배우고 일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을 존중하고 자신과 다른 문화나 가치관, 사고방식에 대해 겸허하고 관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의미의 글로벌한 인물이 되어주었으면 합니다. 도시샤의 창립자 니이지마 죠는 바로 그 좋은 예입니다.
여러분은 여기 도시샤에서 배웠습니다. 호불호를 불문하고 도시샤는 여러분의 인생의 소중한 일부입니다. 니이지마는 인재가 아니라 인물, 더한 지식과 교육, 인품을 겸비한 “한 나라와 세계의 양심”을 도시샤에서 육성하려 했습니다.
“양심”이란 무엇인가, 이것도 아주 어려운 물음이고 정해진 답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양심”이란 자신을 정당화하거나 타인을 공격할 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양심”이란 스스로를 반성할 때에 의미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관용의 정신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념을 가지는 것과 자신을 반성하는 것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작업을 거듭함으로 자신과 입장이 다른 사람에게도 관용해지고 공통점을 확대해 나갈 수 있습니다. 또 “한 나라와 세계의 양심”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성이나 조직력도 필요합니다.
2번째 도쿄 올림픽 5년 후에는 우리 도시샤가 창립 150주년을 맞이합니다. 그 때 여러분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이에 대해서도 상상해 보세요. 그리고 그 때 오늘 말씀 드린“관용”이나 “양심”이라는 말을 함께 상기해 주었으면 합니다.
끝으로 니이지마 죠가 도시샤 제 1기 졸업식에서 여러분의 대선배들에게 보낸 말을 저도
보내 드립니다.
Go go go in peace !
Be strong !
Mysterious Hand guide you !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Good Luc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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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신 시인, 에세이스트, 손호연단가연구소 이사장
이대영문과 워싱톤 죠지타운 뉴욕 시라큐스 대학원, 교토 동지사대학 졸업
방송위원회 국제협력위원, 삼성영상사업단 & 제일기획 제작고문 역임
저서 -치유와 깨우침의 여정, 숨을 멈추고, 오키나와에 물들다
삶에 어찌 꽃피는 봄날만이 있으랴, 그대의 마음있어 꽃은 피고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