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실한 소원이 ' 손호연 2019 8 15
이승신의 詩로 쓰는 컬쳐에세이
어머니의 유언을 전하고 싶다 '절실한 소원이 나에게 하나 있지 다툼없는 나라와 나라가 되어라' 이것은 2005년 한일갈등이 한국 전역으로 고조된 때에, 서울 청와대에서 가진 한일 정상회담 서두에서, 그리고 회담 후 가진 외신기자 회견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연설 중 읊은 한 줄의 시입니다. 작가는 대한민국 유일의 단가 시인인 손호연孫戶妍, 저의 어머니입니다. 그는 일제시대 서울의 진명여고를 마치자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비인 일본인 방자여사가 1941년 동경 유학을 보내게 됩니다. 17세에 동경 제국여자대학에 유학한 어머니는 전공이 가정학이지만 시인인 사감이 교양으로 단가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첨부터 재능을 보인 소녀 손호연을 당대 시성詩聖인 사사키 노부츠나 선생에게 데리고 갑니다.
배고픈 시절 크림 수프를 내주며 스승은 두가지 약속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첫째 일본을 흉내내지 말고 너의 조국 조선의 아름다움을 써라, 그리고 노래짓기를 중도에 절대 포기하지 마라. 그걸 보며 진정한 예술가는 역시 다르다는 생각을 합니다. 일제 강점기, 언어를 말살하려 하고 조상에게 받은 성姓을 갈아치우며 의식을 세뇌하던 시절, 일본 정상급 예술가는 조선에서 온 어린 학생에게 제자가 되려면 조선의 아름다움을 써야한다고 조국을 지키도록 가르친 것입니다.
첫 시집 '호연가집戶妍歌集'을 동경 고단샤에서 출간하고는 서울로 귀국해, 자신만을 빼곤 전부 일본선생이요 일본 학생이 대부분인 무학여고에서 가정학을 가르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1945년 8월 15일, 교내 방송으로 '일본이 항복하고 종전이 된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기댈 데 없는 교무실 한 구석에서 순식간에 바뀐 역사를 생각하다' '겨레가 말없이 순종하던 오욕의 날을 지켜보던 나라꽃 무궁화' 기다리고 기다리던 해방이 온 것입니다.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십대에 겁도 없이 유학에서 배워 마음을 표현해 온 단가 시가 국내에 어울리지 않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적국의 언어로 짓는다는 비난이요 죄책감입니다.
어려서 몸에 배인 언어를 빼낼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재능을 아껴준 스승의 '중도에 포기하지 마라'는 약속을 지켜야 하는가, 애국자라면 버려야 하는가, 어머니 글에 보면 반세기 넘도록 매일 매순간 심하게 갈등했다고 써있습니다.
그러자 1980년 동경 세이조 대학원에서 고전문학 만엽집을 연구하며 나카니시 스스무 선생을 만나게 됩니다. 새 연호 '레이와'를 고안해 내어 최근 각광받고 있는 만엽집 연구의 제 1인자인 그는 한국 시인과의 첫 만남에서 '단가는 백제에서 1300년 전 온 것이니 더 좋은 단가를 지으려면 먼저 한국 부여의 백마강을 보고 오시라'고 했습니다.
아 그렇다면 한반도에서 사라진 시를 천 년후 일본에서 배운 자신이 우리 시의 역사를 한국에서 다시 잇게 되는 것 아닌가 를 크게 깨닫게 됩니다.
'장엄한 역사 속에 내가 존재하고 소홀히 할 수 없는 나의 생명'
반세기 넘어의 갈등과 긴장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며 매진하여 한국의 국화인 '무궁화'를 제목으로 가집 5권을 내게 됩니다. '조국의 사랑과 동아시아의 평화'를 노래한 것에 감격한 일본 독자들은 아오모리에 한국시인의 '시비'를 높이 세우고, 단가를 짓는 천황은 배청인의 자격으로 궁중가회歌會 '우다카이하지메'에 초빙하고, 말년에 일본 제헌국회와 모교 등, 특강 신청이 줄을 이었습니다.
무자비한 일제 강점기로 인해, 31음절의 전통시 단가에 탁월한 한국시인이 탄생하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로니입니다.
영국의 무자비한 아일런드에 대한 식민 통치로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오스카 와일드, 죠지 버나드 쇼와 시머스 헤니 같은 영문학사에 가장 빛나는 이름 몇을 생산해 낸 것이 역사의 아이로니인 것처럼. 다른 점이 있다면 아일런드 작가가 적국의 언어인 영어로 작품을 내어도 조국 아일런드인들은 기뻐하고 환영했는데 손호연 시인의 일생은 조국에서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일생을 새삼 언급하는 것은 냉각된 작금의 한일관계를 생각하며 딸로 마음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일제침략과 식민지, 연이은 민족전쟁과 피난, 근현대사 역경의 일생을 온 몸으로 맞으면서도 오로지 평화만을 소원한 '어머니의 유언'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동아시아 끝자락에 살아온 나 오로지 평호만을 기원했네'
미국의 삶에서 귀국한지 20년이 넘는 동안, 한일의 갈등을 저는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서두에 언급한 2005년 한일 정상회담 때만 해도 지금보다 덜 했던 건 아닙니다. '한일우정의 해'로 두 정상이 선포하였음에도 한국 전역에서 연일 데모가 일어났던 걸 기억합니다.
그러나 이번은 일본의 수출규제까지 겹치어 최악이 되었습니다. 이 지경이 되도록 수많은 전문가들이 바른소리 쓴 소리를 쏟아내지 않은 건 아닙니다. 예견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실제는 미국통이지만 일본통이 어쩌다 되어버린 저도 말로 글로 보태었습니다. 우리의 안보나 대북관계를 시도할 때에 이웃의 '재팬 패싱'은 안된다고 누차 말했습니다.
본격적으로 걱정하게 된 건 지난 겨울입니다. TV로 평창 동계올림픽을 보게 되었습니다. 개회식에 한국 대통령을 비추었는데 바로 뒤 김영남 김여정을 돌아보며 신경쓰느라 멀찌감치 혼자 앉아 있는 아베 총리에게 내내 눈길도 주지않은 걸 보며 걱정이 되었습니다. 실제로는 모르나 화면에 비추인 거로는 그랬습니다.
정상의 권위임에도, 그도 인간이어 서운해 하지 않을 것 같지는 않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기회있을 때마다 '내가 아는 일본사람은 작은 것에 마음을 써주면 그 은혜를 잊지 않는다. 남북관계에 열을 다할 때도 미국 중국 외에 일본도 반드시 함께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러 해 전 삼성이 세계 1위로 올라서자 그 임원이 '소니가 삼성을 도저히 따를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할 때에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 벤치마킹한 거였는데 원하면 반격할 수 있는 그들의 저력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드러내진 않았지만 일본인들이 속으로 씁쓰름해 하는 마음이 분위기로 공기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올 것이 왔다는 생각입니다. 이 소용돌이에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 봅니다.
더 크게 보지 못하는 일본정부를 생각하면 답답합니다. 침략한번 못해 본 선량한 민족에게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고 곧이어 정유재란도 일어났습니다. 동양 평화를 이룬다며 1894년 청나라와 조선에서 싸웠고, 조선을 먹으려한다고 1904년 러시아와 싸워 이기고는 을사보호조약 후 도리어 한일합병을 했습니다.
그렇게 35년간 이 나라를 점령해 언어와 의식을 말살하려 했습니다. 남에게 절대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민족이 그렇게 폐를 끼쳤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폐를 끼친 건 무엇입니까? 기껏 강제징용 배상판결입니까? 사과를 이미 했다는 건가요?
해방 후 태어난 저는 일본 역사도 일본도 배운 적이 없어, 최근 일본 대학에서 공부를 좀 했습니다. 2 천년을 이어 온 양국의 깊은 역사와 인연에 정말 놀랐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그건, 양국이 서로의 역사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본이 사랑한 한국 시인의 일상은 조용했습니다. 생전, 일제 강점기의 고통이나 어려움의 원망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1999년 동경 모교대학의 백주년 기념에 하신 특강 원고에서 이런 글을 발견했습니다.
'강연이 다하자 서울서 함께 졸업한 소학교 일본 동기 동창들이 다가와서는 예전에 잘못한 걸 사죄하려 먼곳에서 왔다며 공손히 절했다. 차별당했던 그들에 대한 수십년 전의 의식이 눈녹듯 녹아내리며 그간의 민족대립도 활짝 문을 열게 된 듯한 순간이었다'
어머니는 용서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런 분 마음에도 그런 응어리가 내내 있었다는 사실과 과연 사과를 하고 받으면 속마음이 풀어지는 거로구나 하는 걸 깨우치게 됩니다. 이웃해 있어 가슴에도 가까운 나라되라고 무궁화를 보다듬고 벚꽃을 보다듬네
隣いて胸にも近き国なれと 無窮花をめでてさくらもめでて 그러함에도 시인은 자신의 조국과 일본이 다투지 말고 가까웠으면 하는 마음을 이렇게 한 줄로 드러냅니다. 끝의 '보다듬고' 로 표현된 메데떼めでて라는 어휘에는 보듬다 봐주다 인내하다 포용하다 용서하다 싫어도 보고 끌어안다 사랑하다 라는 여러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적확한 한국 어휘를 못 찾는 저는 몇 단어를 돌아가며 쓰고 있습니다.
그 어휘를 선택한 어머니의 깊은 심정을 저는 이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강점기에 받은 차별과 상처, 한국내 교육에서도 한글을 못배운 아픔이 컸지만, 메데떼めでて의 마음을 가지고 불화不和를 멈추기로, 제게는 수줍게만 보이던 어머니가 한 순간 결단하는 용기를 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습니다. 결국은 마음이고 결국은 결단입니다. 이 어마어마한 쓰나미가 사라진다 해도, 앞으로 다시는 그런 쓰나미가 없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부는 물론 우리 각자가 그런 마음을 가지기로 굳은 결의를 다져야겠습니다.
점점 더 좁아져 가는 세계, 30세기 40세기에도 함께 살아가야 할 바로 곁 이웃인 것을 이제 마음에 새겨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양국이 진정으로 화해했다는 것을 온 세계가 알도록 해야 합니다.
'다툼 없는 나라와 나라가 되라'는 어머니의 유언을 그래서 여기에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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