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구리'~ 우리 말로 하면 '감율甘栗 단밤'이라고 해야겠다. 반짝반짝하고 동글동글한 게 어려서 갖고 놀던 공기돌 같이 예쁘고 사랑스럽다. 동경에도 길가다 보면 있었지만, 교토에는 기온祇園 번화가 수많은 가게들 사이에 밤 볶는 냄새가 나면 발길을 멈추게 된다. 아마구리는 말그대로 달콤한 냄새가 난다. 밤 종류가 단 것인지 슈가를 넣는 것인지는 아직 물어보지 않았다. 싸주는 봉투에 '명대 아마구리의 노포 히야시만쇼도 名代甘栗の老舗 林万昌堂' 라 써있는 걸 보면 대대로 이어온 이름있는 아마구리 집일 것이다. 물어보니 역사가 150년 가깝고 맛도 좋지만 내 나름 아름다운 추억으로 발을 멈추는 것이다. 따끈해야 맛이 더 나기에 작은 양의 6백엔 짜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그때부터 커다란 철솥에 달달 볶아 저울에 150g 정확히 재고는 일본 어느 상점에서나 그러듯 익숙한 손짓으로 두겹이고 세겹이고 예쁘게 정성스레 싸주려 한다. 그 질 좋은 포장지 버리는게 아깝고 기다리는 시간이 아깝고 봉투를 열어 반짝이는 그 밤을 어서 만져보고 싶어 포장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지만, 나를 알아보면서도 정성껏 포장하려 하여 매번 손들어 스톱을 시킨다. 내가 알기론 이것은 원래 헤이조구리平壤栗 였다. 요즘은 잘 안보이지만 40년 전 아버지와 동경에서 긴자를 걷다보면 밤 볶는 포장마차가 보였다. 아버지는 이게 평양 밤이라고 기뻐하시며 함께 걸으면서 까먹었었다. 한국에서 삶거나 구운 밤은 껍질을 애써 벗겨야 하는데 이 밤은 톡 치면 전체가 쉽게 까지는게 신기했다. 평양산이어서인지 헤이조구리平壤栗 평양 밤이라고 했다. 내가 태어나기 전, 평양서 단신으로 오신 아버지는 처음엔 평양 어머니 ( 내 할머니)가 서울로 다니러 오셨고 갓 신혼의 내 부모님과 함께 '李允模' 아버지 문패가 걸린 집 앞에서 세 분이 사진도 찍었었다. 그 사진이 이젠 내게 없지만 내가 닮았다는 할머니의 그 흑백 모습이 늘 가슴에 있다. 묻지 못한 할머니의 성함은 차車씨라는 성만 들었다. 그 후 38 선이 어머니와 아들 사이 그어졌고, 그리고는 할머니가 다시는 못 내려오셨을 것이다. 아버지가 1983년 가실 때까지 30여 년, 어머니가 그립다던가 고향이 가고 싶다던가 하는 이야길 직접 들은 적은 없으나, 이제 생각하면 평양 밤을 길에서 사고 평양냉면을 찾던 그 자체가 그리던 속마음의 깊이가 아니었을까, 살아계실 때 그런 마음의 한 조각을 알아드렸더라면 그런 효가 없었을 건데~ 아쉬움과 철없음에 새삼 뼈저리다. 이거 평양서 온 거 맞느냐? 동경의 평양 밤 마차 상인에게 물으시던 화안한 그 모습이 그리워 나는 교토京都 기온祇園 거리 아마구리 집을 지날 때면 그 밤 봉투를 사 든다. 머리와 가슴에만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억이 물체화한 것이라고나 할까. 아버지가 묻던 말, 이거 평양서 온 거 맞느냐? 물으니 이젠 중국에서 온다고 했다. 시끄런 세상에도 가을은 오고 있다. 군밤 계절이 오고 있는 것이다. 길가다 군밤 냄새가 나면, 뉴욕 주립대학 New York State University가 있던 뉴욕주 저 북쪽 끝 오스위고 Oswego, 바다같은 오대호五大湖 앞, 2년여 살았던 집의 커다란 벽난로 모닥불에 구워 먹던 기억도 떠오른다. '세 톨만 먹으면 보약이 따로 없다'는 밤栗은 추운 겨울 최고의 간식거리다. 풍부한 영양으로 성장과 노화방지에도 그만이라고 한다. 거기에 저마다의 아름다운 사랑의 기억마저 들어있다면 인생은 조금은 더 아름답게 승화될 것이다. 아버지의 그리움이 한으로 스며있던 헤이조구리平壤栗 두리번거려 보는 텅 빈 긴자銀座 4정목 네거리 달콤한 밤 아마구리甘栗 노포 - 기온 하야시만소도林万昌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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