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역에서 기차를 타니 익산에 1시간 만에 내리는군요.
친구와 얘기 좀 나누다 금방 내리는 느낌입니다.
익산 춘포에 110년 전 일제시대 호소가와 가문이 세웠다는 도정공장(정미소) 1400여 평 공간에 미술가 조덕현이 캔버스와 종이에 그린 회화, 드로잉, 사진, 오브제 (object) 영상 등으로 다양하게 제작한 작품들을 역사 깊은 공간 그대로를 배경으로 결합하며 자신의 예술철학을 맘껏
펼치고 있습니다. 이런 작업을 현대미술에선 장소 특정적 설치작업 (site-specific installation art) 이라고 하지요.
이인성 미술상 등을 받은 유명 화가로 이대 미대 교수, 일본의 도호쿠 예술대 객원교수도 역임한 그가 은퇴 후 춘포의 그 도정공장을 우연히 만나 현대미술공간으로 바꾼 것은 실로 신의 한 수 입니다.
억겹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진 공간이며 인근의 수많은 사람의 삶의 기억들이 저장된 공간으로 이 특별한 작가를 만남으로 그 특성에 맞는 기획을 해 공간과 구상과 관람객의 마음이 함께 호흡하며 대화해 나아갈 것입니다.
공간 서편을 우선 들어서면 반투명 실크 천의 거대한 설치미술이 펼쳐집니다.
복합적 곡선의 모양으로 1년 간 태양의 위치를 같은 시각 같은 위치에서 촬영할 때 나타나는
8자 모양의 아날렘마 (Analemma) 를 시각화 한 것입니다.
스페이스 1 2 3 이 가려진 듯 서로 훤히 보이는데 수조 위 거울처럼 비치는 4개의 관음보살
상이 보이고 우편으로는 온 벽을 차지한 장지에 일제시대 인물들 수백 명을 그렸습니다.
그 그룹 초상화를 누구나 사진으로 보나 자세히 보면 연필로 수많은 사람을 그린 걸 알게
되어 놀랍니다.
스페이스 5에는 정말로 인상 깊은 장면이 펼쳐집니다.
춘포에서 과수원을 하며 살던 이춘기라는 인물의 생애를 일기를 통해 보여주는 설치작업
입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30년 간 매일 일기를 썼고 거기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필사본을 프린트해 높은 벽에 빼곡히 붙쳤는데 글씨체도 그림도 프로급인데다 후세에
남긴 그 정성이 보는 이들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스페이스 6 에 들어서면 커다란 벽에 그려진 회화 작품이 나타납니다.
제목이 flashforward 인 이 그림은 초대형 벽화만 같은데 '인류사의 여러 재난'을 뒤섞어 그렸
다고 합니다. 머리 위로는 높은 천정의 목재 구조물이 보이고 그것이 인류 역사 속 사건들과
어우러져 마치 시네마스코프 영화 장면 속에 있는 듯 합니다.
공간의 하나하나를 보며 감격하다 마침내 7번째 공간에 이르니 캔버스 천에 연필로
대담하게 그려진 한복 입은 손호연 시인이 살아있는 듯 대형 그림의 캔버스 천이 마루로
길다랗게 이어지는데 와~ 순수한 그 영이 현재로 이어지는 형상입니다.
익산은 무왕의 궁 터가 남아있는 백제의 핵심으로 백제와 춘포 인근의 이야기를 이어가다
백제의 시가로는 유일하게 남겨진 시 '정읍사' 가 손호연의 사랑과 그리움의 단가로
마침내 이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프로젝트 이름을 ‘정읍사’ 라 했습니다.
백제 문화의 정수인 향가를 천 년 만에 이어온 손호연을 떠올려 그 서사를 이은 작가의
안목에 감탄을 합니다.
백제와 1400년 전 동시에 사라져 버린 향가가 일본에 전해져 80년 전 일본 유학에서 그
시를 접하며 중도에 포기하지 말고 조선의 아름다움을 쓰라던 전설의 스승과의 약속을
기억하고, 졸업 후 귀국하며 해방과 분단과 전쟁으로 역사가 바뀌었어도 선조의 정신을
자신이 천 년 후 잇는다는 신념으로 지어온 자부심의 표정이 수줍게 드러납니다.
외롭지 않게 하려 함인가 그 곁에는 손호연 프로젝트에 심혈을 기울여 온 딸의 다소곳한
모습이 보입니다. 모녀 시인의 정겨운 대화가 들리는 듯 합니다.
뜰로 나오면 메타세콰이어 신록의 나무 잎이 바람에 흔들리고 풀숲 사이 투명 모뉴먼트
에 새겨진 사랑의 망부가들이 빛을 발하며 하나하나 보는 이의 가슴을 적십니다.
'그대가 좋아하는 꽃은 무엇일까 물어두지 않아 성묘 갈때마다 망설여지네'
'그대가 좋아하는 꽃 이름 하나 모르며 무얼 안다고 하는가 그대 깊은 마음 속'
근처 백제 왕궁 터에는 고려 시대에 세운 오층탑이 긴 세월 서있고, 사라져버린 미륵사
터에 남겨진 9층 탑 그 역사의 시공간이 파노라마로 하늘과 맞닿아 드넓게 펼쳐집니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으나 영안으론 보이는 마냥 만끽하고 싶은 평화로운 고요의 풍경
입니다.
함께 한 분들이 조덕현 작가의 작품과 백제 왕궁 터 풍경에 감탄을 합니다.
샛바람 막으려 걸어둔 보라 빛 치마 주름 사이로 달빛은 비치고
(전쟁으로 초량의 창고에 7 식구가 살며 난방도 없어 떠는데 창 사이로 비추이는 달빛, 대단한 옛 시인의
달 노래에 비할까 만은 추운 밤 샛바람 막으려 걸어둔 보라빛 치마를 통해 쏟아지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전쟁 때 지은 이 단가에 저는 한 없는 애착을 가집니다 - 손호연의 일본 국회 특강 중에서)
가든의 여섯 수가 새겨진 여섯 개의 투명 모뉴먼트를 넘어 저만큼 떨어진 별관 창고
갤러리에 이 시詩가 새겨져 있습니다.
길게 전시하니 익산 춘포에 가보시기 권합니다.
저와 함께 라면 시 해설도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