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신의 詩로 쓰는 컬쳐에세이
JP의 단가 사랑
우리 정치인 중 시 사랑 문학 사랑의 인물이 있나 생각해 본다.
JP 김종필이 떠오른다. 멋과 풍류로 알려진 젊은 총리로서의 그의 모습은 샤프했다.
흔히 군인에게서 갖게 되는 이미지와 달리 여유롭고 멋이 흘렀다. 국내 정치인에게서 그런 지성과 동서양을 아우르는 박학다식함이 있었을까. 수 많은 레토릭도 남겼다.
그가 가자 많은 기사가 쏟아졌고 정치 역정과 공과를 이야기했다. 내가 아는 것도 있고 모르는 것도 있다.
그 중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그가 일본 외상인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와의 회담을 위해 방일 했을 때 객지에 혼자 묵는 남자의 적적한 심정을 적은 단가가 숙소에 걸려 있는 걸 보고 여관 주인을 불러 '이런 시를 쓸 사람은 단 한 사람, 모리시게 히사야 1913 - 2009 뿐' 이라고 시인 이름을 알아맞힌 일은 일본 정가에서 두고두고 회자가 되었다. 그만큼 일본을 깊이 아는 지일파로 통했다>
모리시게 히사야는 시인이 아니고 당대 유명한 남자 배우다. 출연한 영화 주제가와 많은 노래를 불렀고 미소라 히바리와 두엣으로 노래한 적도 있는데 시인이라는 말을 들은 적은 없다. 그러나 인기가 높아 노래도 많이 불렀기 때문에 노래 가사를 지었을 수도 있고 실제로 단가를 썼을 수도 있다.
쓸쓸한 남자의 심정을 노래했다는 그 한 수가 궁금해져 알아보았으나 아직 알아내질 못했다. 끝 구절 '그만큼 일본을 깊이 아는 지일파로 통했다' 가 눈길을 끈다. 어느 만큼 알아야 '깊이 아는 지일파' 로 통하는 걸까. 그 단서는 혹 31 자의 詩 '단가短歌' 에 있는 건 아닐까.
일본 국민은 문학을 사랑한다. 그 중 단가는 일본 고급 문화의 정수로 '마음의 고향' 으로 생각하며 사랑한다. 7세기 전쟁에 진 백제의 왕족 귀족 학자 지성인들이 대거 일본으로 건너가 단가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한반도와 연계된 일본 천왕 가족은 지금도 단가를 짓고 있고 정치인들은 연설에 곧잘 그 시를 인용한다.
2012년 나의 두 시집이 한일 양국에서 나왔을 때 한 권은 일어 단가로 번역을 했고 다른 한 권은 현대 시로 펴내게 되었는데 단가 형식으로 나온 것을 더 감동해 했다.
양국 지도자들이 연설에 나의 시를 인용했고, 작은 수첩에 그 시 중 자신이 좋아하는 88 수를 수첩에 써 들고 다니며 외우는 사람도 보았다.
국회 사무실에서 모리 요시로 수상과 일어 단가집 '삶에 어찌 꽃피는 봄날 만이 있으랴' 를 볼 때는 15분 예정이 1시간을 넘겨 첫 페지부터 끝까지 함께 읽으며 이 시들은 교과서에 실려야 한다고 흥분하기도 했다.
2005년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수상 두 분이 정상회담을 할 때 고이즈미가 어머니 평화의 시 한 수를 읊은 건 잘 알려진 일이다.
2013년엔 JP와 함께 단가 이야기를 한 적도 있다.
어머니는 생전 자신이 일본에서 알려졌다는 표현을 한 적이 없어 딸인 나도 몰랐을 정도로 자신을 낮추었는데, 누군가 한국에도 자신의 시비를 세워 줄 듯 한 분이 나타나자 그것 만은 관심을 두었다.
일본에만 자신의 시비가 서있는 게 맘에 걸린 어머니는 되도록 단가의 발상지로 알려진 부여에 세워지기를 바래, 나와 그 자리를 본다고 부여엘 간 적이 있다. 문화원장의 안내로 세 군데를 둘러 보았는데 다 역사적 유적지여 허가 받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혹 JP를 통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뉘앙스를 그가 남겼고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은 채 어머니는 가셨다.
뭐든 원하시는 걸 보지 못 했는데 어머니가 그 먼 델 가서 돌아 볼 정도로 관심을 보인 건 그게 유일하여 가시고 마음에 걸리던 차에, 당시 무토 일본 대사에게 그 이야기를 하니 '아 나와 함께 가자' 고 했다.
대사와 청구동 JP 집엘 갔고 내가 만든 한국판 어머니 단가집과 일생을 다룬 다큐 그리고 나의 단가집도 보이며 시 이야기를 했다. 뇌졸중을 회복하는 중인 그는 듣는 위주였고 내 이야기에 꽤 관심을 보였었다.
그가 진작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정상회담으로 마주했다면 고이즈미가 시 한 수를 읊을 때, 바로 어머니의 다른 한 수로 맞받아쳐 그 이야기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풍류가 있는 멋진 광경이었을 것이다.
청와대 정상회담 다음 날 일본 신문들에는 내가 그렇게도 권한 대통령 대신, 손호연의 시를 통한 평화 정신을 언급한 고이즈미가 부각되었다.
JP가 보인 관심으로 단가 이야기를 꽤 길게 하다가 정작 부여의 시비 자리 이야기는 꺼내질 못했다. 내가 독대한 이유를 모르고 그는 갔다.
3 김 시대가 있었고 그만이 유일하게 대통령을 지내지 못했다. 그가 가고 동영상에서 '제가 대통령이 되어야 합니다 ' 라고 외치는 모습을 보았다. 아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역대 대통령이 물러나고 봉변 당했던 걸 생각하면 안 하길 잘 했다는 생각도 든다. 했다면 인문학을 바탕으로 한 지성의 이미지는 깨져 버리지 않았을까.
장례식 후, 상여가 그의 집을 돌며 찍은 한 컷 사진을 몇몇 분이 내게 보내주었다. 인터넷 언론에 난 건데 서재 한 가운데 그의 사진이 있고 그 위 제일 왼 켠에 어머니 단가집 하나, 바로 아래엔 내가 이홍구 Pd와 4년 간 만든 어머니 일생의 다큐 '일본 열도를 울린 무궁화' CD가 놓여 있었다. 오래 전 긴 대화 중 그에게 드린 것들이다. 끝까지 마음 깊이 간직한 'JP의 단가 사랑' 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가 태어났고 묻힌 단가의 발상지 부여를 새삼 생각해 보게 된다. 어머니와 하루, 부여의 시비 자리를 보러 다닌 순간도 떠오른다.
과연 그는 여러 면 중 하나로 '일본을 깊이 아는 지일파' 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손호연 단가가 읊어지는 순간 - 2005 청와대 녹지원 이승신 단가집 읽는 모리 요시로 수상-2012 위 왼켠에 보이는 손호연 시집, 아래 시인의 다큐 CD
청구동 자택의 JP - 2013 https://youtu.be/MVa8s6iQ0Mg?si=4wy9EHOdLMKo-QuW&t=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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