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섭 교수는 동경 조지 대학에서 학위를 하고 서강대학과 인제대학에서
비교문학 교수 역임 후 현재 동경 유통경제대학 객원교수로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중 특별히 1938년 부터는 한국에서 한글을 전혀 가르치지
않았다니 15세 사춘기, 문학에 관심이 생길 시기의 어머니는 진명여중고
시절 한국어를 배우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한국어로 된 작품도 접할 수
없었으니 너무한 폭압이었다는 생각입니다
드라마 작가로 유명한 한운사 선생이 어머니 기일마다 시인의 집에서
해온 기념 행사에 몇 번 오시어 놀란 적이 있는데 지금 생각하니
'같은 해 태어난 손 시인도 나처럼 한국에서 한국어 교육을 못 받았구나'
하는 한탄의 동질감을 느꼈겠지요.
후에 뵈니 손호연 전기집 <풍설의 가인> 을 읽고 감동했다 하시며
손호연과 연애하고 싶다는 농을 하기도 했습니다.
서로 만났더라면 공유하는 삶의 역사에 할 말이 많았을 텐데 일제시대
살아보지 않은 사람으로선 상상하기 어렵고 그저 한스러울 뿐입니다.
유성호 박재섭 두 교수의 발표 질의 토론입니다.
이승신
손호연 단가, 혼종성의 미학 <지상에서 가장 빛나는 불빛 하나> 발표에 부쳐 박재섭 도쿄 유통경제대학 객원교수 비교문학
손호연 시인이 살아온 80년과 사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난 100년은 한국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시대적 변화와 굴곡의 연속으로 점철된 한 세기였습니다.
일제 식민지하 정체성의 혼돈, 해방과 더불어 찾아온 이념적 갈등과 대립, 이어진 한국전쟁 발발과 동족상잔의 비극, 전후의 가난과 정신적 상처 등 거듭되는 아픔을 31자 단가로 그렇게 승화시켰습니다.
손호연 탄생 100주년을 맞는 시점에서 향후 손호연 시문학을 기리고 그 연구가 더욱 확산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시작합니다.
유성호 교수의 발표 논문은 손호연 단가 문학의 핵심을 잘 살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경계 너머' '사랑' '꿈'의 주제로 분류하고 그 주제들이 어우러져 작품을 이루고 있는 면모를 세밀히 분석해주셨습니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손호연 시인의 작품은 일본의 대표 전통 시가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 기저에는 원한/해한이라는 한민족 특유의 정서가 자리잡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본의 지성 나카니시 스스무 선생의 '일본인이 결코 흉내낼 수 없는 한국인의 감성이 담겨 있다' 는 말씀도 그런 정서를 두고 한 말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날 저물어 덧문을 잠그네 몇 번을 반복해야 그대 만날 수 있을까
31자의 압축된 시어 속에는 떠난 님에 대한 그리움과 한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날 저물어 덧문을 잠그면 다시 고독과 마주하는 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 시간들이 반복되어도 '그대'가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현실임을 알고 있기에 시인의 한은 더 깊어져 만 갑니다. 그러나 노래의 후반부, 의문의 종결 형식은 묘한 여운을 남깁니다. ‘만날 수 있을까?` 라는 구절에는 만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의 심리와 함께 인고의 시간이 다 하면 '그대'와 재회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과 의지가 섞여 있습니다. 어슴푸레 동터 오는 새벽을 기다리며 칠흑의 밤을 꼬박 새우는 모습 같다고 할까요
버티기 힘든 역사적 중력에서 비롯된 한의 정서와 그 한을 넘어서고자 하는 초월 의식 혹은 극복 의지 사이의 긴장이 손호연 문학을 일관하는 미적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끝없는 흥망의 역사로구나 또 써넣어야지 38선이라고
38선은 한국전쟁에서 비롯된 남북 분단의 지리적 경계를 뜻하지만 듣는 순간 한의 정서가 떠오르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시는 비감어린 애절함이나 무거움만 느껴지는 건 아닙니다. 그 반대의 정조가 균형을 맞추고 있습니다. 초연함이라고 할까요. 마치 시적 자아는 신神의 전지적 시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또 써 넣어야지' 라는 담담한 어조에는 '망'에는 '흥'으로 역전 시켜왔던 역사적 경험들로부터 비롯된 낙관적 의식이 자리하고 있는 듯 합니다.
애이불비 哀而不悲, 한의 극복이라는 한국 문학의 전통적 주제는 민요 <아리랑> 으로부터 고려 가요 <가시리> 그리고 김소월 시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데 손호연 시인의 작품 역시 이러한 한국 문학의 정신적 원천에 잇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손호연 단가 문학의 문학적 성과는 일본의 전통 정형 시가의 규범과 한국적 정서가 융합된 '혼종성의 미학'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 이 점에 대해 의견을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 하나 주목하고자 하는 점은 손호연 시인이 식민지 시대의 중간 쯤인 1923년 태생이라는 점입니다. 1938년은 시인의 나이 15세, 사춘기에 접어드는 해로 이즈음 해서 문학에 관심과 흥미를 갖기 시작했으리라 추정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1938년은 제 3차 조선어 교육령이 시행됨으로서 일선 학교의 교과목 중 조선어 과목은 수의 과목 (선택 과목)으로 격하된데다 대폭 수업 수까지 줄게 되어 실상 폐지된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 되고 맙니다.
식민지 시대 작가로 함께 분류되는 이광수 최남선 등은 1890-1900년대 생으로 유년기는 한학을 소년기는 독학으로 한국어 (당시는 조선어) 를 도일 후엔 본격적으로 일본어를 공부한 작가들입니다. 작품 창작에 한문과 한국어, 일본어를 다양하게 구사했습니다.
1910년대에 태어났던 작가들 역시 한일 합방 이후 교육을 받은 세대였습니다. 충분하진 않으나 체계적으로 한국어를 교육 받은 세대라 할 수 있습니다 (일본어 교육이 한국어 교육의 3배 정도로 주가 되었으나) 이들은 앞 세대와 달리 독학이 아니라 초 중등 교육에서 한국어와 일어를 공부한 세대입니다. 이후 많은 작가들이 일본으로 유학함으로 한국어 외에 일어로 작품을 남기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들에게는 문단의 형성 그리고 한글 문예지, 신문의 출판과 보급 등 문학 창작의 환경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이에 비하면 1920년대 생 손호연 시인의 문학 세대는 앞의 두 세대에 비해 한국어 교육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1923년 같은 해 태어난 작가 한운사는 ’스무 살 될 때까지 한국어 소설을 읽지 못했으며 우리 글을 배운 적이 없다‘ 고 증언한 바 있습니다. 손호연 시인 역시 식민지 시대 이중 언어 사용의 환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만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아가면서 공용어로서의 일어 사용은 더욱더 엄격히 요구되는 현실을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창작을 위한 언어적 선택은 위의 두 세대에 비해 훨씬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손호연 시인은 일생 한국에서 창작을 하였어도 일어로 되었다는 이유로 국내에서 크게 관심을 받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비판의 표적이 되기도 했습니다.
학계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비록 한국인이 한국에서 겪은 역사적 경험을 기반으로 해 창작한 작품이라 하더라도 일본의 전통 시가 양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으로 인해 연구 대상에서 소외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좀 더 학계가 트랜스 내셔널한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 이 점에 관해 의견을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향후 손호연 시문학의 연구 방향, 연구 방법론에 대해서도 생각하신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손호연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마침내 한국에도 시비를 건립한 지금, 우리는 새로운 이정표 앞에 서 있습니다. 일본에서 높이 평가 받는 시인의 작품을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하고 재평가할 시점에 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아시아 평화'를 그토록 희구했던 그의 정신적 문학적 유산을 어떻게 계승해야 할지를 모색하는 출발점에 우리가 지금 서있음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근배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 축사, 고려대 김영근 교수 사회
유성호 교수 김영근 교수 사회, 이인호 교수右의 축사 '박재섭 교수(右) 유성호 교수' 의 발표와 토론 손호연 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 신간 2권 헌정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