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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야とらや 양갱

  • 조회 2125
  • 2020.03.21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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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라야とらや  입구                                                                  2020  2 14

   

이승신의 로 쓰는 컬쳐에세이

 

도라야とらや 양갱

 

 

손호연孫戶姸 프로젝트와 일생 헌신하신 한일관계의 일을 정부나 더 전문가가 하길 바랐으나, 갑자기 어머니 가시고는 할 수 없이 내가 그 바톤을 이어받으며 일을 할수록 한탄한 것이 하나 있다.

 

일제시대, 일본 대학 대학원을 나오신 아버지 어머니가 어린 나에게 영어만이 아니고 일어도 공부해야 한다는 말을 왜 하지 않으셨을까. 대학을 서울에서 나오고 미국에 유학가 오래 있었던 나는 일어가 꼭 필요한 건 아니었다.

 

일본 동창들이나, 변리사 회장이신 아버지의 일본 고객들이 집으로 오면 일어로 대화하는게 간간히 들렸으나 관심이 없었고 식사 후 아버지가 '우리 딸이 노래를 하겠습니다' 하면 어린 나는 순종하여 기타로 노래를 했었다.

평양사범을 나오면 학교에서 2년을 가르쳐야 하는 책무로, 만주에서 보우 넥타이를 매고 음악을 가르치신 아버지가 노래나 피아노를 일상에서도 잘 하셨는데 여흥은 내가 한 것이다.

 

생각할수록 그때 일어를 외웠으면 속도가 빠르고 일하는데 도움이 되는 건데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당시 한국인이 흔히 쓰던 몇몇 단어는 두고두고 기억이 나는데, 후에 보니 그게 일어였다. 다라이 오뎅 요깡~  그렇다, 거기에 요오깡이 들어 있었다.

 

그 말들은 대야 어묵 양갱羊羹 보다 내게 익숙했다.

동경에 처음 가서 묵은 호텔에 요깡이 전시되어 있고 하얀 천에 도라야とらや라고 쓴 굵직한 붓글씨와 빨간 회사마크가 찍혀 있어 눈에 띄었다.

아버지가 동경 출장에서 사오신 것들이다.

 

후에 보니 데이코쿠帝國 호텔 뿐 아니고 긴자銀座, 롯봉기六本木 힐즈, 미드타운 등 최고급 상업지에만 도라야 점이 있었다. 1520년 교토에서 시작된 도라야는 1869년 동경으로 천도할 때 옮겨왔고, 지난 500년 간 왕실에 요깡과 생과자를 대온 유명한 노포老鋪(시니세) 다.

  

교토에서 공부할 때 동지사대학 근처이자 옛 왕궁 고쇼御所 앞에 있는 긴 도라야とらや를 지나며, 여러 해 동경서 보아 온 그 도라야를 그린 적이 있다. 그게 교토 창립인 걸 모르던 때였다.

 

왕실 거래로 올리는 매상이야 별게 아니겠으나 그것으로 올리는 '최최고급' 브랜드 가치는 별난 것이다. 도라야とらや 하면 왕실을 떠올릴 테니.

 

매출도 대단하나 그들의 그런 고급 이미지 유지를 위한 노력은 더 대단하다.

1980년 파리에 도라야 점을 냈고, 도라야 카페에서는 단팥 한천 등 동양 소재로 하여 아이스크림 푸딩 서양적인 걸 조화시킨 제품을 만들어 낸다. 그 역사도 비슷한 업종에 처음이어 대단하지만, 전시된 '도라야 문고とらや文庫'를 보고는 놀랐다. 전통과자와 연관된 좋은 서적들과 문구 등 많은 제품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나도 한 권을 일본 친구에게 선물로 받았다. '일본과자를 사랑한 사람들' 이라는 제목의 예쁜 책 속에는 역사적인 영웅과 인물들이 특별히 사랑한 도라야 제품 하나하나의 스토리가 사진과 함께 재미있게 쓰여져 있다.

 

'전통은 혁신의 연속이다'

오래된 시니세老鋪 기업들이 자주 인용하는 이 멋진 모토를 처음 만들어 낸 것도 17대째 내려오는 도라야다.

 

왕실 이야기가 나와 조용히 처음 발표를 한다.

2011년 3월, 일본에 거대한 쓰나미가 나고 연일 엄청난 인명피해를 보며 어머니를 떠올렸다. 저들이 사랑하는 시인이 강렬한 한 줄의 시로 위로를 한다면 그들에게 힘이 될 텐데. 마음이 가까워질 텐데 안타까워 했다. 그러자 일본서 오는 전화에 누군가 '이선생이 해보시라' 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어 웃었다.

 

그러자 한 두번의 뉴스가 아니고 매일매일 종일이니 하나하나 메모해 본 것이 며칠 새 250개가 되었다. 일본 아사히 산케이 신문에 NHK에 모녀시인 소개와 함께 나의 8개 시가 인용되고, 신문사들로 TV로 시인의 나머지 시도 보여달라는 많은 전화가 연일 온다고 했다.

 

정말 어려운 작업이었지만 도움을 받아, 그렇게 서울과 동경에서 단가와 현대시, 다른 형태로 두 권의 책이 나왔고, 몇 경로를 거쳐 천왕의 손에 들어갔다고 일본 대사와 일본 문화원장이 2012년 나에게 전해주었다. 궁내청宮內廳 최고위직에게 갔으니 수시로 뵈는 천왕에게 전해진 듯 하다고 지극히 조심스레 말하였다. 3 년을 조용히 계시면 후에는 알려지지 않겠는가 라고도 했다.

 

일본 천왕은 양갱 뿐 아니고 양복 등 여러 곳과 연관이 있겠고 선물도 오겠으나 책은 받지 않는다고 한다. 아키히도明仁 천왕부부가 시인인데다 워낙 책을 좋아하고 출간되는 책이 세상에는 많으니 스스로 원하는 책을 사 본다고 들었다.

 

엄청난 쓰나미로 몇 만명이 한꺼번에 간 슬픔에 잠겨 있을 때에, 인접국인 우리의 진솔한 마음이 전해졌으면 하는 마음이 일본 국민의 대표격인 천왕에게 전해진 것을 보람있게 생각한다.

 

당시 미국이 제일 큰 기부금을 냈고 두번 째가 프랑스였으나 이런 따뜻한 마음을 표현해 준 한국을 더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해 준 일본인들도 있었다. 문학을 사랑하는 국민다운 말이다.

 

'3중의 대참사를 겪는 일본에 대해, 누군가 예와 품위를 제대로 갖추고 위로하는 사람이 우리나라에는 나오지 않는 것인가 궁금하게 기다렸는데 바로 우리 이승신 시인이 그 일을 해내셨군요'  받은 반응 중 최정호 선생님의 편지다.

한일관계의 현 상황을 생각하면 암담하나 그 생각을 하면 인접국과의 관계가 다시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내게는 있다.

 

도라야とらや는 그런 이미지에 수익 창출마저 엄청나나, 그런 수익은 아니라 할지라도 갈등없이 서로 잘 되었으면 하는 한결같은 마음은 아직도 지니고 있다.

 
 

 

 


 

 

                    도라야 상징 호랑이로 문구 그릇 등 여러 제품을 만든다

 


 


  

 

                                동서양을  조화한 도라야 수제 과자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가 사랑한 도라야 별사탕 '과자를 사랑한 사람들'에서


  


                              파리의 도라야 점과 그 곳 양갱과 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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