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 백선엽白善燁 장군과의 만남을 가졌다.
마침 6 25 날이다.
그리운 내 아버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름있는 친구 두 분이 있다.
부모님 결혼에 함을 지신 최규하 대통령이 그 하나다.
평양출신의 아버지가 만주 신경의 로 스쿨인 대동학원을 다니실 때의 동기 다.
졸업 후 아버지는 먼 길인 서울에 와서 상공부에서 관직을 시작했고 아직 일자리를 얻지 못한 동기 최규하님은 우리 집에 자주 오시어 어린 나를 안아주시곤 했다고 한다.
아버지 급히 가신 후 아버지를 아는 분들이 하나 둘 가시고 그 분만이 남아 계시어,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여러 번 말씀을 드렸는데 답이 없었다. 나는 진심으로, 아버지와의 기억을 듣고 싶은 것이었는데, 당시 역사의 진실을 조용히 함구하려는 마음으로 마다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아버지 아는 분들이 다 가신 후에는 섭섭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2007년 10월, 아는 분이 갑자기 백선엽 장군께 인사를 가자고 했다.
나는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그 분이 평양사범을 나오셨다며 서로 알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걱정이 되었다. 6 25 전쟁에 나라를 구한 영웅이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분이지만, 내 아버지와 동기가 아니어서 아버지를 모른다면 전쟁이라곤 아는 게 없는 나는 그렇다면 무슨 대화를 해야 하나 걱정이 된 것이다.
직업 군인이라면 움츠려만 드는데, 장군께서는 용산의 전쟁기념관 사무실에서 친절히 맞아주시며 자리에 앉자마자 아버지 이야기부터 꺼내신다.
'이윤모 선생은 평양사범 2년 선배로 아주 유명한 분이다. 학업에 뛰어나고 인물 좋고 교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등 다방면에 유능하여 이름을 떨치었다. 아버지가 졸업 후 만주에서 음악선생을 하실 때 월급은 몇 원 몇 전이었고 ... '
몇 해 전 장군께 직접 들은 이야기도 이제 쓰려니 얼마였는지 생각이 안나는데, 80 몇 해 전 숫자까지 외우시는 그 분의 세밀함과 꼼꼼함이 놀라워 나는 입을 벌렸다.
대단한 명성에 비해서는 첫 인상이 서민적이요 소박함이 느껴져, 늘 만면에 웃음을 띄고 여유롭고 재미있게 말하시는 아버지의 세련됨과는 좀 다른 모습이지만 그 신실함과 신중함, 80년도 너머 전의 기억을 일일이 외우시는 섬세함이 정말로 놀라울 뿐이었다. '나는 첫째가 정직이야. 그래서 미군 사령관들이 내 말을 믿어 주었지' 라고 하신다.
그 후 중앙일보에 그의 일생이 매일 연재로 나간 후 특강에 초청받아 들은 전쟁이야기에도 나는 놀랐다. 그 기억력이란, 매 전투마다 장소와 상황은 물론, 날자와 시간까지 세세히 기억하는 게 놀라웠고 그 용기와 용맹으로 나라를 구한 것에 감복했다.
6 25 때 낙동강 전선 다부동까지 인민군이 내려 온 것을 '내 고향 평양을 잘 안다'며 직속 상관인 밀번 군단장을 설득하여 작전 계획까지 변경시켜 가며 한국군을 끌고 밤낮을 평양까지 걸어 입성했던 명장이며 대한민국 최초의 육군 대장인 '전설의 영웅'이 내 눈 앞에 살아계신 것만도 기쁨인데, 80 몇 년 전 아버지와의 이야기를 오리지날 평양 분에게 직접 들음은 감격이었다.
당시 평양사범은 가난한 수재가 가는 학교로 한 학년이 백명인데 (그 중 일본 학생이 10 명) 이숭녕 선생 같은 한국어 스승도 있었지만 거의가 일본에서 온 선생이었고 영어도 배울 수 있었다. 전쟁에 장군이 쓴 영어는 평양사범에서 배운 것이라고 했다. 오르간이 200대로 오케스트라가 있었고 내 아버지는 성악도 잘 하시고 피아노와 바이올린, 지휘도 했는데 만주 신경에서 2년 의무교육 음악을 가르치다 신경 법대를 갔고, 자신은 교사를 안하고 군관학교를 바로 가고 싶어, 없는 살림에 어머니가 마련한 500원을 사범학교 학비로 변상하고는 사관학교에 진학하기에 이르렀다.
그때는 어떻게든 일본을 이겨보자는 마음에 애국심이 넘쳤고 공부를 치열하게 했다고 한다. 특히 나의 아버지는 투쟁심이 있어 여러 분야에서 1등을 하려 했고 아주 유능한 분으로 관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는 말씀도 하신다. 백선엽 장군의 뛰어난 애국심은 물론 내가 아버지에게서 배운 애국심과 리더십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현 시국의 나라 걱정도 하신다. 우리가 평화로이 살려면 김정은을 이겨야 하는데 지난 70년을 돌아볼 때에 이기는 길은 전쟁 밖에 없다고 했다. 서른 살의 그가 온 몸을 바쳐 적화가 되지 않도록 구한 이 나라가 적화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절이 전해져 온다.
장군을 마주 하면 내게서도 애국심이 달아 오른다. 그리고 35년 못 뵌 아버지가 어제처럼 떠오른다.
평양과 만주, 서울에서도 친하게 지내셨다는 그 분과의 손 잡음은 아버지의 손을 잡음만 같아 가슴이 저며온다.
교토 동지사 대학의 기록이 들어간 나의 신간을 전하자 창립자인 '니이지마 조' 이름을 장군께서 언급하여 놀라니 일본의 다른 유명 다섯 대학의 창립자 이름도 하나하나 거명한다. '아니 어떻게~ ?' 하니 훌륭한 분이어 가슴에 새긴다고 했다. 방씨 어머니가 '일본 사람들은 경우가 밝다' 고 한 말도 전하신다.
'니이지마 조'에 대해 내가 쓴 챕터를 손가락으로 짚어드리며 돌아서 나오는데 '존경합니다, 이선생 ~ ' 우렁찬 대장님의 소리가 들린다.
힘주려는 내 아버지의 음성만 같다. 기어코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진다.
아버지의 친구 중 두 분이 대한민국 역사에 기록된다면, 오로지 한 개인의 개인사적 판단이나, 십여 년 애타게 청해도 끝까지 못 뵙고 가신 분도 있고, 백세가 되도록 마다 않고 언제나 친절히 맞아주시는 분도 있음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