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3 17
설국 雪 國
최병효 대사님의 에치고 유자와 다녀오신 글을 보니 꼭 10년 전의 광경이 영화의 씬처럼 제 앞에 흐릅니다
어머니 갑자기 가신지 10여 년 어려서 외할머니가 저를 끼고 기르신 게 10년, 대학 졸업 후 미국 유학을 가 머문지 20여 년, 손가락 꼽아 보니 어머니와 함께 산 건 실제 몇 해가 되지 않네요
살아계실 제는 당연히 여기다, 가시고는 너무나 아쉽고 안타까워 끝 무렵 같이 번역한 어머니의 시 작업을 이으며 잘 모르는 제 나름 어머니의 발자취를 찾는다고 한국과 일본의 여러 곳을 찾아 갔습니다 그 중 하나가 에치고 유자와, 가와바다 야스나리 '설국'의 고장입니다
어머니와 직접의 연관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일본의 첫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고 '설국' (유끼구니)을 읽은 적이 있어 동경을 간 김에 기차를 타고 그 소설의 유명한 첫 문장처럼 '국경의 긴 터널을 지나니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까지 하얘진 듯 했다' 를 온 몸으로 느끼며 역에 내렸습니다
점심을 미쳐 못한 오후, 역전 앞에 수타우동이라고 쓰인 현수막이 펄럭였습니다
작은 실내에 주방이 힐끗 보이고 벽에는 사람 키보다 더 높은 눈벽을 가로질러 걷는 여인의 눈그림이 눈에 들어옵니다
다음 해 시인 어머니 기일에 맞추어 그림 전시회를 기획하고 있어 동경에서 이름 있는 화가들을 만났고 유자와는 오로지 가와바다 야스나리 대문학가의 자취를 보려 온 것인데 첫 발을 디디며 만난 게 '설국' 다운 유자와의 눈 그림이었습니다
우동이 기대 이상이었고 화가의 거처를 물으려 주인을 찾으니 주방 저 뒤, 흘낏 보이던 손으로 우동을 빗고 있던 남자가 나오며 그 여성 화가가 90이 넘어 이제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고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좀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며 실제로 만날 수만 있다면 어머니 시를 테마로 하여 그림을 그리게 설득하는 건 할 수 있다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거절하던 분들이 한 줄의 어머니 시를 실제로 접하면 그것을 테마로 새로운 예술을 창작하는 예를 많이 보아왔기 때문 입니다
대신 그가 인근의 화랑을 소개하여 택시를 타고 가을 들판을 한참 지나서 꽃그림 전시를 보고 많은 엽서를 샀으나 그 눈 그림이 눈에 서렸습니다
우동 남자에게 손에 들고 있던 제가 만든 어머니 시집을 건네며 이런 시를 테마로 그릴 세계의 수준급 화가를 찾고 있다고 말하고는 가와바다 야스나리가 머물며 '설국'을 썼던 다카한高半 여관을 향했습니다
하루를 묵고는 걸어서 역전으로 가는 길에 노벨상 작가의 기념관을 들리고 역전 앞, 예의 우동집에 다시 발길을 멈추었습니다
비록 할머니 화가는 못만났지만 그 우동 맛이 일품이었습니다. 우동집 작은 홀에서는 주방 안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제가 들어가자 우동을 빗던 그 남자가 무척 반가워하며 급히 나오더니 공손히 절을 하고는 그 단가집을 밤새어 보았고 감동 감격이어 말을 이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동경에서 만나는 분마다 보이는 그 감격의 태도이지만 종일 우동을 치는 고단한 손으로 한 밤에 그 페이지를 넘겼을 그 우동 손과 마음 자세를 보며 저는 감격했습니다
글을 쓰는 하얀 사각의 시끼시와 붓을 재빨리 꺼내오며 한국에서 스키를 타러 오니 한국어와 일어로 시 한 줄을 써주면 벽에 붙치고 한국에서 오는 스키인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마침 그 무렵 서울의 한일정상 회담에서 두 정상이 외웠던 손호연의 평화의 시
‘절실한 소원이 나에게 하나 있지 다툼없는 나라와 나라가 되어라’
를 써주었고 아주 수줍게, 하나만 더 써주시면 안되겠습니까, 하여 마침 그 작은 마당에 동백꽃이 피어 있기에 어머니의 동백꽃 시 중의 하나를 다시 적어 주었습니다
‘간밤 바람에 수많은 꽃봉오리 떨어져 있네, 동백꽃이라 불리우지도 못하고’
맛있게 먹은 우동 값을 받지 않았고 선물을 주었고 역에 제가 완전히 들어가기까지 정성을 다하여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설국 이야기가 나오면 그 생각이 났고 지난 10여 년 스피치와 낭송, 강연으로 일본에 수 없이 갔지만 그 곳을 다시 가볼 기회는 없었습니다
최병효 선생과 우리나라 전직 대사 십여 분이 스키로 나에바에 간 김에 제게 얼핏 들은 그 옆 유자와를 다녀오시며 우동을 빗는 한 남자의 감격에 덩달아 자신들이 감격한 스토리를 전해주는데 저까지 울컥 감격해지니 이 감동의 고리는 오랫동안 외면해 온 이웃 나라 두 정상의 만남보다 훨씬 더한 감동이 전파되는 고리요 우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어주는 아주 기쁜 소식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두 정상에게 자꾸 바뀌라고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뀌어야만 합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우리나라요 우리 마음을 다 합친 것이 우리의 격입니다. 국경을 넘어 펼쳐지는 이런 두 나라 국민의 마음 교류는 그간 얼어붙었던 우리의 관계를 마침내 녹여내고야 말 것입니다
쓰라린 역사를 다 잊을 순 없지만 앙금 내려놓고 성숙한 평화를 기원하다
이 승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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