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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 조회 3132
  • 2014.12.16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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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녀시인  2002


                  "손호연 시사상의 재해석" - 경희대 강연

 

 

                                         손호연단가연구소 이사장  이승신      

 

 

절실한 소원이 나에게 하나 있지 다툼 없는 나라와 나라가 되어라

 

이 한 줄의 시는 손호연 시인의 간절한 마음을 담은 것으로 노무현 대통령과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수상이 청와대 정상 회담 중에 그리고 회담 후 외신기자 회견 연설 중에 읊고 그 정신을 말하기도 한 시입니다

 

시인이 가고 1년 후 2005년 초, 서울에서 한일우호의 해가 선포된 자리에서 우리의 대통령과 일본 대표로 온 모리 수상의 연설을 들었습니다. 처음 본 노대통령의 원고 없이 한 연설은 기대 이상 훌륭했고 거기에 손호연 시인의 평화 정신이 깃들여 있었다면 완벽하겠다는 생각을 맨 앞줄에 서서 했습니다

 

그러자 곧이어 독도로 야기된 큰 데모가 연일 이어져 한일관계 굵은 행사들이 취소되며 한일우호의 해를 무색하게 했습니다

 

심히 걱정하다 그 해 620일, 한일정상회담이 오기에 우리 대통령에게 손호연의 시와 평화를 바라는 시인의 간절한 소원을 보였고  일본에는 시인의 전기집 작가와 중의원을 통해 그 날 만난 모리 수상과 당시 수상인 고이즈미 수상에게시인의 책과 일생의 다큐멘타리 DVD를 전했습니다

 

10년 전의 그 순간을 떠올린 것은 그때의 한국 데모가 대단했고 매스콤의 영향으로 전국이 여러 달 들끓었음에도 요즘같은 최악의 한일 관계로까진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그 시인의 딸로 작금의 한일 상황에 무거운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어머니는 그 많은 차별과 아픔과 상처를 받았음에도 갈등 없이 서로 평화롭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을 가시는 순간까지 지니고 있었고 그 마음과 사상을 한 줄의 시예술로 승화하여 일생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1923년 11월 15일, 91년 전 바로 오늘 손호연 시인은 태어났습니다

이왕가가 세운 진명여고를 졸업하고 마지막 황태자비인 이방자여사가 동경 유학을 보내어 동경 제국여지대학 (현재의 이름은 사가미여자대학) 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방자여사가 유학을 보낸 10여 명이 홍희료라는 이름으로 기숙사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훗날 돌아가시며 제자 손호연에게 자신이 목숨같이 아끼던 두툼한 일본 성경책을 물려준 니시모리라는 처녀 사감이 있었고 마스도미라는 단가 시인인 미인 사감이 있었습니다. 그의 남편은 전라북도 고창에 고창고보를 세운 분입니다. 두 사감 선생님이 손호연을 아끼며 영향을 주었고 1965년 한일수교 후에는 한국의 제자를 찾아 각자 방문하여 저의 집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마스도미 선생은 기숙사의 홍희료 학생들에게 교양 과목으로 단가시를 가르치려 했는데 첫 수업에서 손호연을 제외한 모든 학생이 어려워서인지 조국의 얼을 빼앗기는 거 아닌가 하는 마음에서인지 나가버려 선생님 가장 곁에 있었던 손호연 학생만이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마스도미 선생은 다음 수업부터는 사사끼 노부쯔나, 일본의 시성詩聖으로 불리우는 단가 대가에게 데려다 주며 단독으로 배우게 했습니다

 

학생들이 나가버리니 가르치는 선생님께 미안해서 자신마저 빠져나갈 수가 없었지만 후에 어머니 말씀 중에 나가자는 교우들의 말을 제대로 못들은 것도 있다고 했습니다

 

운명이란 그런 것인가 봅니다

17세 소녀의 단가 첫 수업이 일생을 그렇게 이어졌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서울의 학교를 다녀도 조국이 없기에 모국어를 쓸 수가 없고 쓰게 되면 '국어 사용'이라는 큰 팻말을 목에 걸고 벌을 서야 했습니다

당시의 국어는 당연히 일본어였지요

동경 유학을 가 전공으로 한 것은 당시 여학생에게 인기였던 가정학이었는데 기숙사에서 교양으로 시작된 단가 수업에 학생이 한사람 뿐이었고 소질도 보여 당대 시의 최고 대가에게 수업을 받게 된 것입니다.  

 

가정학을 전공하며 대학 재학 중 내내 사사끼 선생 댁으로 가서 배우게 되었는데 배고프던 시절, 가면 선생님이 내오시는 스프와 따뜻한 빵이 좋아서 수업하러 갔었는지도 모릅니다. 시를 지어가면 스승이 제자의 손을 쥐고 붉은 펜으로 고쳐가며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손길로 이어지는 제자와 스승의 눈에 보이지 않으나 획실히 보이는 시심을 저는 상상해 봅니다 

 

지금도 일본에 가서 어머니가 사사끼 노브쯔나 선생에게 전에 사사를 했다고 하면 믿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톨스토이와 같은 자기네 시성인데 어떻게 이선생 어머니가 독단으로 그것도 몇 해나 배울 수 있었는지 의아해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는 스프에서부터 붉은 펜의 가르침 등  다 손호연의 단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일본의 문학으로 알고 배웠고 일본인들이 자신의 정신적 지주로 알고 있는 단가시가 그러나 실은 한국에서 간 문학이라는 것을 손호연이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입니다. 사사끼 노브쯔나 선생의 추천문까지 들어 간 '호연가집'을 대학 졸업 후 1944년 동경에서 펴내고, 귀국하여 당시 서울의 일본 학교인 무학여고의 유일한 한국 선생님으로 가정학을 가르치게 됩니다

 

1947년  평양 출신으로 상공부 과장인 이윤모 선생과 결혼을 했고  6.25 동란에는 3년을 부산 초량에 피란을 가 거기서 낳은 갓난 아이와 함께 전쟁의 포화 속에 물도 없고 먹을 것도 부족한 고통의 나날과, 종이 펜도 없어 시를 받아 적을 수도 없는 힘겨운 원시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5남매를 낳아 키우고 1979년 다시 단가 연구를 위해 동경에 가서 단가와 만엽집 연구의 최고 대가인 나카니시 스스무 선생을 만나게 됩니다. 그에게서 '단가는 1400여년 전 구다라 (백제)가 뿌리이고 거기에서 쓰여지다가 백제가 멸하여 모두들 일본으로 이주해 와 여기에서 짓고 전해주게 된 것이니 더 좋은 단가를 지으려면 백제의 부여와 백마강을 가보고 오라" 는 말을 듣게 됩니다 

 

치마저고리 단장하고 나는 맡네 백제가 남긴 그 옛 향기를

 

나라가 독립이 된 후  바로 그 의식을 바꾸는 작업에 들어간다 해도 섬세한 십대에 입력이 돤 단가를 더구나 재능과 소질을 크게 인정받은 시를 그만 둔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한국어는 집에서 쓰니 잘 하지만 한국학교에서 한국어 교육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 물론 한국어로도 글을 쓰지만 일제 시대 교육의 결과로, 일어로 해야 리듬이 더 착착 감기고 표현이 잘 됬겠지요

 

독립해 나라를 되찾아 의식을 바꾸는 싸움이 새로운 과제가 되었네

 

사사끼 노브쯔나 선생은 첫 시간에 어린 소녀에게 두가지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내게 배우려면 첫째 중도에 포기하지 마라. 그리고 일본의 시를 흉내내지 말고 조선의 아름다움을 쓰거라'  일본 이름으로 창씨개명들을 하고 일본식으로 세뇌를 할 때였는데  그것은 실로 진정한 예술가의 말입니다

 

해방이 되자 그 전에 한국어를 쓰면 벌서고 감옥을 가던 게 이젠 모두 뒤집어져서 일어를 쓰면 잡혀가게 생겼습니다. 더구나 일본 정신의 핵심 골수로 되어 있는 단가를 지으니 시인은 주위를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게 됬습니다.  글을 쓰던 사람이 글을 놓는다는 것은 고문일 것입니다. 거기다 단가 쓰기를 중도에 포기하지 말라던 스승과의 약속도 있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이 진정한 애국자라면 단가를 그만두어야 하는게 아닐까, 그러면 자신은 애국자가 아니란 말인가, 단가시 작업을 계속해야 하나 포기해야 하나, 그 갈등은 여기저기 글에 보면, 반세기 이상을 매일 온 종일 매순간 피를 말리는고민의 연속이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수 십년 후, 단가 연구의 최고 대가인 나카니시 스스무 선생의 '단가는 백제의 것이다' 라는 선포에 뛸 듯이 기뻐했을 손호연 시인의 당시 심정을 상상해 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사라진 우리 시의 천년 후 유일한 후예로 끊어진 대를 잇는 것이 되니까요

 

단가를 매개로 한 한국 시인 손호연의 운명을 생각해 봅니다 

 

1400여 년 전, 660년에 향가를 지어오던 문화국, 백제가 전쟁에 멸하고 죽임을 피하려 제 발로 걸을 수 있는 이십만명 모두는 일본으로 이주했다고 합니다

백제에는 '서동요' 같은 16수의  짧은 시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그 후 일본으로 간 백제의 왕족 귀족 학자 문화인들과 그 후손 도래인들은 계속 그 시를 지으며 전하며 천왕이 '단가 짓는 사람'으로 명명이 될 정도로 온 국민이 어려서부터 배우고 지어오며 일본의 국시로 꽃을 피우게 됩니다

 

거기에 천년너머 처음으로 한국인 손호연이 일본 유학에서, 우리의 오래 된 옛 시를 일본 대가에게 사사하고 한국에 귀국한 후  단가 시작 詩作을 60년 해오다 인생 후반에 일본에서 단가의 최고 대가로 인정받은 것을 생각할 때에 그것은 사라진 우리의 시인 단가를 손호연 시인으로 다시 잇게 된 것이요 고급 문화의역사가 연결된 것이기도 합니다

 

전후 경제적으로도 성공한 일본은 온 세계에 자국의 문화 이미지를 넓히고 문화의 중심인 문학에서도 가장 핵심인 단가를 세계에 퍼져 있는 일본문화원 등을 통해 전하여 미국 카나다 프랑스 영국 등 특히 선진국에서는 초등학교 중학교 교과서에 실리고 가르치고 자국어로 쓰고 있고, 일본이 전한 고급 문화로 알고 있으며 심취해 있음을 최근에도 유럽에서 목격하고 왔습니다

 

손호연 시인은 일생을 한국에서 단가를 지었지만 바다 건너 일본에서 대가로 인정받았고 1997년, 일본 독자들은 북단 아오모리에 손호연의 시비를 높이 세웠으며 1998년에는 천왕의 궁중 어전가회에 대가로 초청받아 우리의 아름다운 치마 저고리를 입고 천왕과 황후가 지은 자작 단가를 스스로 낭송하는 것을 들어주는 영예로운 '배청인'의 자격으로 참석했습니다. 유일한 외국인이었고 공직 이외에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한 일본 천왕과의 만남입니다  

 

경사스러운 날에 맞추어 치마저고리 지어 입고 조심스레 걸어보네

 

숨 다하시기까지 63년에 걸쳐 지은 2000 수 이상의 손호연 시인의 단가 테마는 대략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ㅡ      한국의 근현대사

 

         나라 잃은 사람만이 알 수 있지  타국 사람은 알길이 없네

 

        바닷 바람에 만국기 나부끼는데 조국의 깃발은 무슨 한으로 우는가

 

ㅡ    통일의 염원

 

        분단된 조국 비록 영토는 작지만 통일을 꿈꾸며 써보네 대,한,민,국

 

ㅡ    동아시아의 평화

 

       동아시아 끝자락에 살아온 나, 오로지 평화만을 기원하네

 

ㅡ    인류에 대한 연민

 

        시를 생각하는 연마된 마음엔 우주의 인간이 다 아름답기만 하네

 

ㅡ    자연에 대한 경외

 

       찔레꽃 뾰족한 가시 위에 내리는 눈은 찔리지 않으려고 사뿐히 내리네

 

ㅡ    사랑하는 님을 향한 마음

 

        그대여 나의 사랑의 깊이를 떠보시려 잠시 두 눈을 감으셨나요

 

       가신 후 그대는 큰 바위 되어라 나는 담쟁이 넝쿨되어 천년을 살리라

 

 

손호연 시인은 시문학을 국제 외교로 넓힌 시인이기도 합니다

 

세계의 어느 문학가도 외국의 언어로 써서 그 나라를 대표하는 왕이나 대통령 총통이나 수상, 총리의 인정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손호연의 시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그 나라 국민의 문화의식과 단가를 짓고 자신의 자작시를 대가를 모시고 낭송하는 천왕 개인의 역량이나 소양을 그런 면에서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그 시에는 조국인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마음, 조국 통일의 염원, 치마저고리, 문창호지, 장독대 등이 나오지만 일본에 대한 칭찬이나 찬양은 없습니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면 그들의 의식은 대단한 것입니다. 가령 일본 시인이 한국어로 시를 쓰는데 자기의 조국인 일본을 사랑하고 찬양하는 내용만이 주라면 우리는 과연 어떠한 반응을 보일까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보다  곁에서 지켜 본 아주 작은 체구 어머니의 가슴 속 큰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생전에 어머니 시에 관심을 전혀 보이지 않다가 당대의 이름 있는 시인으로 일어도 잘 아시는 구상, 조병화 선생을 몇 번이나 찾아가 어머니 시집 번역 작업을 해주십사 부탁했지만 한 줄 시의 번역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셨고, 아무리 아무리 기다려도 어느 누구도 그 연구 작업을 하지 않아, 어머니 가실 무렵 할 수 없이 일본에서 하루도 공부를 안한 제가 한 권의 책을 기획 번역 출간하며 처음 깨닫게 되고  그 후의 몇 권 출간 작업과 시인의 10주기에 4개국어 손호연 단가집 출간과 행사들을 하면서 더욱 더 가슴으로 느끼게 되는 것은 시를 통해 보는 시인의 국경을 초월한 세계와 인간과 사물에 대한 깊은 애정과 연민입니다

 

지구상 어느 나라치고 가까운 이웃과 문제 없는 나라가 있겠습니까만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과의 지리적 역사적 관계로 야기된 일들은 이제는 수교 후 최장의 껄끄러운 기간이 되어 식민지 시대의 경험이 전혀 없는 저의 가슴까지 누르고 있습니다

 

역사 인식, 독도 영유권, 위안부 문제,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 등의 사안으로 한일관계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아베 정부는 문제가 있으면 만나서 대화로 하자는 뜻을 여러 경로를 통해 전하고 있고 우리 대통령은 서로의 시각 차이만 드러날 것이라면 무엇하러 만나느냐고 한지 2년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슬픈 것은 전에는 반감이 좀 있어도 국민들이 그런 것은 정치인들의 사정으로 치고 그렇게 갑갑해 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관계가 점점 길어지면서 혐한이니 반일이니 하는 어휘와 함께 국민들의 마음까지 소침해지고 한류로 떠들썩할 때가 언제였느냐는 듯 서로의 마음이 멀어지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몇 해 만나지 못한 한일정상회담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큰 손해이니 자존심 버리고 만나라고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두 정상이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으로 보아서는 만나는게 쉬운 일도 아니지만 만난다고 해서 무엇이 극적으로 바뀔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우리 각자의 기본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면 만난다고 해도 상황이 다시 반복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바뀌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손호연의 애정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애정 있는 인간관계, 애정 있는 나라와 나라의 관계는 국경을 초월한 서로의 진실된 이해로부터 시작된다고 시인은 말했습니다

 

지극히 작은 일화 하나를 소개해 드립니다

 

어머니가 1998년 궁중 신년가회에 참석한 다음 날 아침 서울에서 함께 간 손주의 물을 사려고 작은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중년 부부가 어머니를 맞이하며 여행 중이십니까. 어느 호텔에 계시나요.  어느 나라에서 오셨는지요, 하며 계속 물었습니다. 서울에서 왔다고 답한 뒤, 두 분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하고 물으니 뜻밖에도 아오모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갑자기 활기를 띄며 '저도 작년에 거기 간 적이 있어요. 사과가 맛있는 곳이지요. 거기에는 제 시비가 세워져 있어요' 하니까 그들이 이해가 안되는 표정이어서 발음을 좀더 세밀히 하며 설명을 했습니다

 

그 순간 주인이 갑자기 최경어로 바꾸며 선생님은 참 훌륭한 분이신가 보군요 라고 말하며 공손히 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오는데 포테이토 칩 한봉지를 건네주며 손자에게 주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하는 그에게 그냥 나오는 것이 안되어 포장지를 받아 그 뒤에 단가 2 수를 적어 주었습니다

 

고국을 멀리 나의 노래비가 서도다 이웃하고 나란히 다정히 지내라고

 

절실한 소원이 나에게 하나 있지 다툼없는 나라와 나라가 되어라

 

읽고난 뒤 부인이 울먹이며 '이웃끼리 사이좋게 지내야지요' 라고 하며 다시 공손히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며 오래도록 머리를 들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완전 감동되어 눈물이 그만 나와 버렸어요' 라며 눈물을 닦았습니다. 옆에 있던 남자의 눈도 붉어졌습니다. 어머니는 더럽혀진 한 장 밖에 없다는 명함을 받아 그 상점을 나왔습니다

 

다음 날 귀국 후 그 감동이 식기 전에 어머니는 한장의 편지를 썼습니다

'어제는 아침 일찍부터 폐를 끼쳤습니다. 만난 적이 없는 제 손주에게 주신 포테이토칩은 제 손에 건너온 순간부터 그것은 하나의 물체가 아니라 제 한 수의 시와 함께 한일친선의 가교 역할을 충분히 했습니다. 이 미담은 제 가슴에 오래오래 남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앞으로도 사이좋게 지내요'

 

그렇습니다

일상의 삶을 통해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민간 외교관이 될 자격이 있고 그렇게 되는 것이 훨씬 더 절실하고 즁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부와 정상과 정치인에게 밀고 기대하고 기다리고 그것을 비평하다가 많은 시간이 갔습니다. 외국에서 크게 인정받는 손호연의 문학을 일어와 시문학의 대가들이 알아서 잘 하시겠지 하며 대책없이 기다리다 많은 세월이 갔듯이 말이지요

 

3년 전 동일본에 대재난이 일어나, 한국인으로 일본의 사랑을 받는 시인 어머니가 계시다면 힘 있는 한 줄의 시로 가족과 집을 잃은 이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을 텐데 하며 안타까워하다 200여 수의 제 단가집을 한일 양국에서 낸 적이 있습니다

 

그걸 계기로 매해 3 11에 최대 피해지 미야기현 게센누마에 가서 시낭독과 스피치를 해왔는데, 그들이 한국 국민의 마음은 양국 정부의 마음과 다르군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에 감동해 하며 오해가 풀렸다는 듯 한 그리고 좋은 관계이길 바라는 진실된 그 표정과 태도에 제가 오히려 감동을 받았습니다

 

일본 인구의 5분의 3 이상이 1400년 전 바다를 건너간 백제인의 후예라고 일본전문가에게 들었습니다. 너무 가깝기 때문에  지리적 이웃을 뛰어넘기 때문에 숙명적으로 서로 좋아하기도 하고 때로는 갈등을 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경제  안보 다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같은 피로 이어진 혈연이라 생각할 때 진정성 있는 좋은 관계를 하루 속히 가질 수 있게 되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리 전 수상이 아베 수상의 친서를 가지고 오고 그 후에도 무게 있는 특사를 보내오는 등 발 빠른 움직임이 있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대통령은 최근 한중일 정상회담을 제의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면 정상들이 만난 후 더 악화될 수도 있습니다

 

이웃해 있어 가슴에도 가까운 나라되라고 무궁화를 보다듬고 벚꽃을 보다듬네

 

어머니 가신 후  일본 출판인에게 들었습니다

제가 '보다듬고' 라고 번역했던 메데떼 愛でて라는 단어에는 보듬다 봐주다 인내하다 포용하다 용서하다 보기 싫어도 보고 끌어안다 사랑하다 라는 여러 뜻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시를 풀어 설명하게 되면 그 독특한 의미가 날아가 버리지만 오랜 세월 보다듬을까 말까, 봐주고 포용하고 용서해 줄까 말까, 한번만 더 봐주고 사랑할까, 갈등에 갈등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시인 어머니는 손을 뻗쳐 보다듬고 쓰다듬기로 결심하게 된 것인지 모릅니다

 

그 마음의 긴 과정이 이 촌철의 시 깊숙이에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 풍성한 의미를 지닌 어휘를 선택한 어머니의 심정을 가신 후 이제야 조금 깨닫게 됩니다

 

무엇이든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선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쉽지 않았지만 그런 마음을 가지기로 시인은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결국은 마음입니다

각자의 마음을 합친 것이 한 나라의 마음이요 수준입니다

 

이제는 정상의 만남만을 마냥 고대하기 보다 우리 국민 한사람 한사람이 그런 마음을 가지기로 단단히 결단하고  광복 70주년, 한일 수교 50주년을 뜻깊고 자랑스럽게 맞이하게 되기를 '한국의 모녀시인'은 간절히 소망합니다

 

 

쓰라린 역사를 다 잊을 순 없지만 앙금 내려놓고 성숙한 평화를 기원하다

 

                                                                                               이승신 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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